유럽사회, 이스라엘에 등돌리다

2025-05-21 13:00:00 게재

영국 FTA 협상 중단, EU도 재검토 … 가자지구 위기에 무관용 모드로

20일(현지시간) 가자 지구 전쟁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하원의원들에게 연설하는 영국 외무장관 데이비드 래미. 영국은 이날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 협상을 중단하고, 외교부로 이스라엘 대사를 소환하며 가자 지구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행태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AFP=연합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위기가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유럽 주요국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재설정에 나섰다. 신중한 태도를 이어오던 영국과 유럽연합(EU)은 본격적인 외교·경제 제재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영국 정부는 20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중단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와 군사작전을 강화하며 촉발된 인도적 재난 상황에 대응한 조치다. 데이비드 래미 외무장관은 이날 하원에서 “현재 상황은 국제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며, 양국 간 협력의 기본 조건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영국은 동시에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이스라엘 정착민 3명과 관련 단체 4곳에 추가 제재를 부과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래미 장관은 “역사가 이들을 심판할 것이며, 전쟁 확대와 구호 차단, 동맹국의 우려를 무시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같은 날 유럽연합(EU)도 움직였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카야 칼라스는 브뤼셀에서 열린 외교장관 회의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이스라엘과 체결된 연합 협정(Israel–EU Association Agreement)의 재검토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칼라스 대표는 “27개 회원국 중 17개국이 재검토에 찬성했다”며 “이스라엘은 구호물자 반입을 막고 있으며 이는 협정 제2조의 인권 존중 조항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해당 협정은 2000년 발효됐으며,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 정치적 대화, 과학기술 협력 등을 포괄한다. 만일 협정이 유예되거나 무효화될 경우 2022년 기준 이스라엘 교역 1위인 EU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이번 조치의 핵심 배경은 가자지구의 기근 위기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인질 석방 압박을 이유로 3개월 가까이 가자지구에 대한 구호물자 반입을 차단했다. 5월 19일과 20일 밀가루와 의약품 등을 실은 트럭 수십 대가 제한적으로 진입했으나, 유엔 구호 창고까지 물자를 옮기지는 못한 상태다. 유엔 대변인 스테판 뒤자리크는 “물자가 들어왔지만 실제 배분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현재 가자지구 주민의 약 20%가 기아 상태에 있으며, 약 1만4000명의 영유아가 심각한 영양실조에 놓였다고 경고했다. 유엔 인도주의 사무차장 톰 플레처는 “이스라엘이 허용한 물자는 바다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압박도 이어지고 있다.

CNN에 따르면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이 전쟁은 너무 오래 지속됐고,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기아에 시달리는 현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와 공동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이 군사작전을 중단하고 구호물자 반입을 전면 재개하지 않을 경우 “구체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응이 비례성과 인도주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전직 장군이자 민주당 지도자인 야이르 골란은 “정신이 온전한 국가는 민간인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은 가자 작전으로 외교적으로 외톨이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반발했다. 외무부 대변인 오렌 마르모르스테인은 “영국과 EU의 조치는 정치적 퍼포먼스일 뿐이며 외부 압력에도 안보 노선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비난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유럽의 정책 전환은 단순한 성명이나 유감 표명이 아니라 실질적인 외교·경제적 수단을 동반한 경고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권과 국제법의 기준을 앞세운 유럽의 선택이 향후 이스라엘 정책 변화로 이어질지, 아니면 외교적 충돌로 확대될지 주목된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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