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트럼프, 관세협상 무기로 환율압박’ 확신
최근 원화·엔화·대만달러 일제 상승
FT “첫번째 협상나선 일본 예의주시”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 환율이 의제가 될 것이라는 시장의 베팅으로 아시아 주요국 통화가치가 달러 대비 상승하고 있다. 시장참가자들은 트럼프정부의 고율관세를 낮추기 위해 아시아 각국이 환율시장 개입에 소극적이라는 신호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는 분석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2일 “한국원화 일본엔화 대만달러는 최근 강한 상승세를 보인다. 올해 들어 달러대비 가치가 가장 많이 오른 통화들”이라며 “각국이 미국의 고율관세를 낮추기 위한 무역협상에 앞서 환율개입을 자제하고 있다는 시장의 추측이 반영됐다”고 전했다.
씨티그룹 아태지역 환율 헤드인 네이선 벤카트 스와미는 “시장은 미국이 아시아 각국과 무역협상에 나서면서 조건 중 하나로 환율을 언급할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대형펀드의 한 투자자도 “환율은 무역협상의 일부일 것”이라며 “환율시장은 무역협상이 전개되기 전 미리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만과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수출강국들은 달러자산을 대거 쌓아둔 대표적 나라들이다. 때문에 그같은 시장의 예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골드만삭스 아시아거시연구 공동헤드인 티모시 모우는 “아시아 각국의 통화가치 상승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일본과 영국 프랑스 서독 등 주요 경제선진국들이 달러가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동합의한 플라자합의 같은 방식(이른바 ‘마러라고협정’)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을 낮게 본다. 대신 양자간 환율협의가 이뤄질 것으로 확신한다. JP모간 외환전략 공동헤드인 미라 찬단은 “다국적 단일안 합의보다 양자간 개별합의가 타결에 이르기 훨씬 쉽다”고 말했다.
지난주 한국원화는 달러 대비 2.2% 상승했다. 이달 초 한국과 미국의 당국자들이 환율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한국정부가 이를 인정하면서다. 원화 움직임은 이달 초 대만달러의 역대급 가치상승에 뒤이은 것이다. 미국과의 무역협상이 대만달러를 밀어올렸다는 시장의 판단이 주요 이유였다.
대만중앙은행은 그간의 관행과 달리 이례적으로 즉각개입을 주저했다. 시장은 통화가치 상승을 용인한다는 정책적 판단이 작용한 신호로 해석했다. 홍콩의 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대만달러 가치 급등은 ‘체제전환이 다가오고 있다’며 대만중앙은행이 시장에 보내는 신호였다”고 말했다. 대만중앙은행은 당시 “미국 재무부가 통화가치 상승을 협상의제로서 요청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애널리스트들은 미국이 무역협정 조건으로 아시아 교역국들에 환율개입을 절제하라고 압박하는 상황이라고 확신한다. ING 글로벌 마켓리서치 헤드인 크리스 터너는 “현재 상황에서 아시아 주요국이 환율개입을 자제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각국 외환트레이더들은 자국 통화가치 상승이 장기적 흐름이라는 판단 아래 포지션을 조정하고 있다. 대만의 한 대형보험사 재무팀장은 “이달 초처럼 대만달러 가치가 급등하는 형태는 아니겠지만, 가치상승 움직임이 장기 트렌드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홍콩의 또 다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아시아 각국 트레이더들은 일본이 미국과 타결하게 될 무역합의 내용이 향후 아시아 각국 환율을 좌우할 핵심열쇠로 본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의 미국과의 무역협상 타결은 지연되고 있다. 지지율이 낮은 이시바 시게루 정부는 관세의 완전한 면제를 고수하고 있다. 7월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을 의식해서다.
미국 재무부 스콧 베센트 장관과 일본 가토 가쓰노부 재무상은 21일 캐나다에서 열린 G7재무장관 모임에서 만났다. 환율과 관련해 공식적인 합의는 없었다. 가토 재무상은 기자회견에서 “환율 수준이나 일본의 미국채 보유량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측 성명서에 이례적으로 환율과 관련한 명확한 문구가 담겼다.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돼야 한다. 현재 엔-달러 환율은 펀더멘털을 반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노무라 수석환율전략가인 고토 유지로는 G7 모임에 앞서 “이른바 ‘숨겨진 환율 거래’가 이뤄질 조건들이 무르익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은 트럼프정부와 공식 관세협상을 개시한 첫번째 나라다. 하지만 자동차 수출품에 매겨진 25% 관세를 낮춰보려는 일본의 노력은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고토 전략가는 “일본이 엔화를 달러 대비 3~5% 상승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상호이해가 있다면 미국은 관세를 10%로 낮추는 것에 합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일본은행이 계속 기준금리를 올리려 노력하고 엔화 급등시 구두개입을 자제한다면 엔화는 자연적으로 오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골드만삭스는 위안화의 경우 달러당 7.20위안인 현재 환율이 향후 12개월 동안 7.00위안까지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골드만삭스 모우 헤드는 “시장이 위안화의 점진적 상승을 허용할 것이라는 환경이 조성됐다. 이는 엔화와 원화 대만달러가 추가적으로 상승하는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