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진나라 군대의 귀가제도에서 배우는 지혜
중국 최초로 통일왕조를 달성한 진시황의 군대에는 귀가제도가 있었다. 징집된 병사들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일정기간 돌아가도록 보장하는 귀가제도는 엄격함의 상징인 진나라 군대의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나라는 이 제도 덕분에 더욱 강력한 군사력을 건설하고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상 고대에 해당되는 이 시기에 귀가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전쟁 방식은 인간의 완력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인구 200만~300만으로 추정되는 진나라도 초나라와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최대인 60만 군대를 동원했다. 유소년층과 노년층을 제외한 남성 인구의 절반 이상을 원정군으로 편성한 것이다. 전국시대 나머지 6국은 병력 확보에 급급해 이런 제도를 채용하지 않았다.
진의 전국 통일로 성공을 거둔 이 제도는 몇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전시에도 경제가 국방 못지 않게 중요
첫째, 진의 이 제도는 국방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요즘 용어로 국민편익을 파격적으로 담고 있었다. 흔히들 국방 사안은 대상자들에게 희생과 ‘열정페이’를 요구하지만 진나라는 인간적 배려와 고통의 균등한 분담을 추구했다. 병역에 따른 국민 불만을 해소하고 나아가 민군 일체를 도모했다.
구체적으로 징집 기간 2년이 끝난 진나라 병사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징집 기간인 병사들도 계절적 경작 시기와 겹치는 경우 일정 기간 귀가해 농사 일을 계속하도록 했다. 또 가문별로 일정 징집비율을 할당하면서 순환 징집하도록 했으며, 부자 또는 형제가 동원될 경우에는 부, 장자를 우선적으로 돌려보냈다. 대신 귀족의 병역면제를 없애고, 체계적인 인구조사와 등록을 통해 병역을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담시키는 등 군 복무 대상을 확대했다.
둘째 전시에도 경제가 국방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진 개혁가 상앙이 전반적인 국정개혁을 실시한 가운데 이런 제도를 도입하자 징집된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지속적으로 경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국가는 농촌의 지속적인 노동력을 보존하게 돼 농업생산력을 유지했다. 진은 전시에도 국가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했으며, 식량 등 군수물자도 풍족하게 쌓아두었다. 진나라가 대승을 거둔 장평대전과 초나라 정벌전쟁에서 장기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경제력에 힘입은 것이다.
반면 다른 6국은 징집기간이 끝난 병사들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가족 가운데 힘쓰는 남성은 군대에 붙잡혀 있으니 농사지을 사람이 없었다. 백성들은 굶주렸고, 전쟁세금은 가혹했으며 도망치는 유민이 급증했다. 그럴수록 국가와 관리의 착취는 극심해졌고 경제력은 형편없이 추락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흔히 국가의 생사가 걸린 전쟁에서 국가경제를 생각할 틈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전쟁 시기여도 남성 청년들을 100% 징집하지는 않는다. 국가경제를 유지해야 하기 위해서는 후방에서 일해야 하는 역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1기부터 국가안보전략서에 경제안보를 추가한 것도 경제와 안보를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셋째, 진의 귀가제도는 맹목적인 국방비 증액 주장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때 국방비 증액을 대폭적으로 주장할수록 국가안보를 염려하는 부류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경제를 무시한 과다한 국방력 증가는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냉전시기에도 소련이 미국과 대결하면서 과도한 국방비 집행으로 결국 경제 파탄에 이어 국가파탄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무리한 국방비 증액보다 경제성장이 우선
서유럽 국가는 냉전체제 붕괴로 안보위협이 줄어들자 곧바로 국방비를 대폭 줄였다. 국방비는 안보라는 공공재를 구성원에게 안겨주지만 속성상 생산유발 고용창출 등 파급효과가 민간 투자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방비는 2000년대 이후 국민총생산의 2.1~2.5% 수준을 맴돌고 있다. 국방비 배분 비율은 이제 경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국방비 증액을 위해 무리하게 배분하려는 목소리보다는 먼저 국가경제 규모를 늘리는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