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대개조를 시작한다 ④ 조성렬 경남대 초빙교수
“혼돈의 국제질서…유연한 다자협력과 실용외교로 돌파해야”
기존 질서 무너지고 새 질서 구축 안 된 위기의 시대
미국엔 자동차·반도체·MRO 등 활용해 협상력 높이고
중국의 잠재적인 지정학 리스크에 비례 대응할 필요
북한에 대해선 ‘적대적 2국가’에 대한 입장 마련해야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 질서가 아직 들어서지 않은 상황을 ‘위기’라고 정의했다. 조성렬 경남대 초빙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새로운 통상 질서의 부재, 국제연합(UN) 등 집단안보체제의 기능 약화 등이 나타나고 있는 현 국제정세를 ‘그람시적 위기’ 상황으로 진단했다.
트럼프 2기를 맞은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방위비 증액과 통상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전랑 외교를 펼치고 있는 중국 역시 주변국에게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북한은 과거 남북이 맺어온 합의를 모두 파기하고 2국가론을 선언하며 지난 과정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렸다.
한국은 미국의 통상 압박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중국의 잠재 리스크를 적절히 관리하고, 경색된 남북 관계도 풀어낼 해법을 찾아야 하는 복잡한 숙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대전환기 속에서 한국이 추구해야 할 외교 방향은 무엇일까.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20년간 몸담으면서 남북문제를 비롯 한미동맹, 일본방위 정책, 중국 대외전략 등을 연구해왔던 조 교수는 무엇보다 정확한 현실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리 실용외교를 강조했다. 상대가 미국이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상대가 가진 리스크를 냉철히 진단하고,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조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4일 진행됐다.
●현 국제 정세를 종합적으로 조망한다면.
이탈리아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아직 신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을 ‘위기’라고 했는데, 현재 국제 정세가 그런 상황이다.
경제 통상 쪽은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신통상 정책을 쓰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무역기구(WTO)나 국제금융기금(IMF)나 세계은행(WB) 등도 위기를 맞고 있다. 안보 분야도 국제연합(UN)이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을 중심으로 한 집단안보체제가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하면서 소다자 안보 기구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에는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이 중소 국가들의 크고 작은 분쟁을 중재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 왔는데 지금은 오히려 강대국 발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변화한 안보 환경에 따라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겨냥한 쿼드(Quad, 미국, 일본, 인도, 호주 참여)나 오커스(AUKUS, 호주, 영국, 미국 참여)가 생기고 한·미·일, 미·일·필리핀 등도 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중심의 양자 체제에서 일시적으로 미국 유일 패권체제가 됐다가 지금은 이제 다극 체제로 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트럼프 2기의 외교방향은 어떻게 봐야 하나.
현재 미국 정부의 최대 과제는 36조달러가 넘는 재정 적자 감축이다. 이를 위해서 연간 700억달러 규모의 대외 원조를 대폭 줄이겠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해외원조 기관인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사실상 해체하는 수순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에 대한 분담금을 대폭 축소하거나 납부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국방 분야도 예외가 아닌데 국방부 장관 헤그세스 메모에서 나온 것처럼 8500억달러에 달하는 국방 예산을 매년 8% 감축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유럽사령부, 중동사령부, 아프리카사령부를 줄이고 북부사령부와 남부사령부를 통합할 계획이다. 또 인도 태평양 사령부와 한반도 특수전구를 통합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마디로 미국의 재정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동맹국들에게 방위비를 늘리라고 하고, 통상 압력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러시아를 활용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리버스 닉슨’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트럼프 1기 때 렉스 틸러슨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틸러슨은 러시아에 투자를 많이 한 석유회사 엑손모빌 회장이다. 여기에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한 뒤 석유를 활용해 석유가 부족한 중국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러시아 게이트’가 터지면서 트럼프가 친러시아 정책을 쓸 수가 없었다.
2기에 들어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개입하면서 다시 ‘리버스 닉슨 전략’을 관철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나 EU 가입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세력권(Area of Influence)을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다. 슬로베니아, 벨라루시 등 친러시아 국가들과 심지어는 북한까지 포함해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묵인하겠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와 중국이 서서히 멀어질 것이다.
●이러한 미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우리가 상당 부분 미국에 안보 의존을 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부분에서는 정면 대응하기가 어렵다. 또 대미 흑자 구조인데, 미국이 영국, 호주, 일본, 한국, 베트남 다섯 나라를 지목해 이 나라들이 미국의 이익을 뺏어간다고 했기 때문에 로키(low-key)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희토류를 비롯해 대응할 만한 카드가 있어서 미국에 정면 대응을 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단은 미국의 요구를 최소화시켜서 들어주면서 우리가 대미 우위에 있는 분야를 통해서 이익을 관철하는 게 중요하다. 대표적인 게 조선업이라든지, 해군이나 공군 MRO(유지·보수·정비) 분야를 지렛대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반도체나 자동차도 미국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 협상력을 가지고 있어 이를 활용해야 한다.
●한중관계는 어떻게 평가하나.
사드(THAAD) 배치와 그에 대한 중국의 한한령 대응으로 이미 문재인 정부 때부터 한중관계는 좋지 않은 상태였다. 시진핑 정부가 전랑(戰狼) 외교, ‘늑대 전사 외교’로 불리는 공격적이고 강압적인 외교 노선을 취해오면서 윤석열 정부에서도 좋지 않았다.
만약 미국이 아시아에서 손을 떼고 중국이 사실상 지역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 과연 지금과 같은 국제 관계가 유지될지 생각해봐야 한다. 중국은 서해의 2/3가 자국 해역이라고 주장한다. 해양 경계선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다수 국가들은 중간선 이론을 주장하는데 중국은 대륙붕 연장설에 가까운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도에 대해서도 거리로는 우리나라랑 가깝지만 인구, 경제 비중 등을 따져서 계산하면 중국 영토라고 주장한다. 대만해협에 대해서도 모두 중국 바다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모든 상선들이 중간으로 지나는 게 아니라 대만쪽으로 최대한 붙어서 지나간다. 그러면 아무래도 운항이 불편해진다.
여기에 만약 대만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 해상 교통로가 심대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한국은 해상 운송의 90%가 남중국해를 지나기 때문에 중국발 지정학 리스크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중국발 지정학 리스크는 존재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잠재적 리스크다. 해상 영토와 영해 주장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움직임은 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대비도 이에 비례해서 해야 한다.
한미일 안보 협력의 틀은 만드는 건 찬성이지만 특정국가를 겨냥해 군사훈련을 실시하거나, 3국 안보 협력을 아시아판 나토로 발전시켜 노골적인 군사기구를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과잉 대응이 되는 것이고 오히려 중국의 주장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줄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20% 정도다. 한중 무역은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면서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 모델을 생각해 볼 만하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협력을 하면서도 안보 면에서는 대립적인 관계로 가고 있다.
우리는 중장기적으로 중국의 지정학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해서 한미, 한미일 안보 협력의 틀을 유지하되, 리스크가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한중일 포괄협력도 지속한다는 방침을 취해야 된다.
●한일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한일관계는 항상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봐야 되기 때문에 실제로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시바 정권 같은 경우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전향적이다. 우리가 굳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도 트럼프 이후에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해체되고 지금 새로운 통상 질서가 아직 안 만들어진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은 공동의 입장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 대상이어서 우리가 쉽게 손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유사한 입장에 있는 일본과 손잡을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는 협력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고 안보 분야에서 기본적인 안보 협력의 틀을 만들어 놓고 깨지 않게 유지 관리만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새 정부에서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북한은 2023년에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했다. 우리가 남북 대화를 하려면 ‘적대적 2국가’에 대한 입장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 6월 4일 새 정부가 취임하면 당분간은 대북 경계감을 유지하다가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대북 제의를 내놓아도 늦지 않다고 본다. 이때 대북 제의 핵심은 경제 협력을 하자는 게 아니라 북한이 주장한 적대적 2국가 관계에 대한 답을 들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북미 대화가 안 이뤄졌으면 우리가 제안하는 대화도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북한이 북미 대화에 응할 것인가 하는 게 남는데 이것은 조건이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미러 관계가 본격화됐을 때 그때 이제 북한이 러시아와의 군사 관계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면서 미국과의 대화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 규정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어떤 게 있나.
동서독 관계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동독과 서독은 두 개의 국가로 존재하지만 ‘전체로서의 독일’은 하나라고 하면서 국가의 연속성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두 국가(state)는 아니지만 국가성(statehood)은 있다고 봤다. 그러는 한편 서독은 동독이 외국이 아니라면서 동독 주민도 서독 주민처럼 대우해줬다.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내세웠던 특수관계론보다는 조금 더 두 국가 관계에 근접한 타협안을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 상호 국가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새로운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남북기본협정’을 체결하는 게 현재 남북관계에 있어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한다.
박소원 기자 hope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