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반도체 지정학 시대' 대비할 때다

2025-06-09 13:00:12 게재

미·일·대만·인도 전략적 연대 … 인도·태평양 반도체동맹으로 공급망과 기술 블록화 추진

한국은 반도체 제조 강국이다. 반도체는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이고 지난 4~5월 반도체 수출은 역대 월별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5월 반도체 한 품목의 수출이 138억달러로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는 국제경제 환경에 민감한 품목이다. 반도체 수출이 잘될 때 미래에 대한 준비를 잘해야 한다.

반도체의 중요한 특징은 메모리든 비메모리든 생산에 필요한 원료·소재·장비가 글로벌 공급망으로 구축돼 있어 지정학적인 고려가 필수라는 점이다. 게다가 미중 간 기술패권경쟁 격화로 세계 각국은 반도체 산업에 대해 새로운 경제안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그 전략은 대체로 ①자국 내 공급기반 확충 ②기술우위 확보·보호 ③공급망 블록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각국 ‘반도체 경제안보전략’모색 중

미국은 2022년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해 반도체 기술 주도권을 강화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의 80% 이상이 아시아, 특히 중국과 경제적 관계가 긴밀한 대만과 한국에 집중돼 있다. 미국 입장에서 미-중 군사충돌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공급망이 몰려 있는 것이 경제안전보장상 큰 리스크로 인식되었다. 미국 빅테크는 대부분 TSMC의 대만 공장에 의존하고 있어 대만 유사시, 미국의 AI·클라우드·국방시스템이 모두 위험에 처한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반도체는 기술과 지정학이 결합된 경제안보의 중심 이슈로 부상했고, 여기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국가와 지역이 일본과 대만이다. 미국·일본·대만은 각각의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긴밀한 연대를 실현하고 있다.

여기에 인도까지 비(非)중국 협력 파트너로 끌어들여 사실상 반도체를 매개로 한 경제안보 동맹이 형성되는 상황이다. 즉 미국은 기술패권 경쟁에서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 기반을 확립하고, 동맹국 기업들과 ‘비(非)중국 공급망’ 연계를 강화하는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다.

먼저, 대만-미국이다. 대만은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기존 반도체 협력을 리스크로 인식한 TSMC는 2020년 미국 애리조나에 공장을 짓기로 발표하고 총 1650억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수탁 생산공장 ‘팹(Fab) 21’을 건설했다. 1공장은 2024년 4분기에 4나노 반도체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2공장은 2028년부터 3나노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이 공장은 미국이 중국에 맞서 기술패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일본-미국, 일본-대만이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 제조를 한국과 대만에 넘기고 대신 소재 및 장비를 공급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안보 관점에서 메모리와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리쇼어링’으로 전환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과 2021년 ‘미일 경쟁력 및 회복력(CoRe) 파트너십’을 출범시켰다. 미일이 반도체의 공급망 회복력 강화, 차세대 반도체 연구 개발에 협력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2022년 일본정부 주도로 설립된 라피더스(Rapidus)는 미국 IBM과 기술 제휴를 맺어 홋카이도 치토세 공장에서 2나노급 차세대 비메모리 반도체 시제품 생산을 시작해 2027년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 일본은 대만 TSMC와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TSMC는 2022년 츠쿠바에 첨단 후공정 R&D 센터를 설립했고, 구마모토현에 파운드리 공장(JASM)을 건설해 2024년 12월부터 12~28나노 비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비중국 공급망으로 ‘경제안보동맹’ 형성

이어서 인도와 미국 일본 대만의 협력이다. 인도는 세계 최대 인구와 IT기술 기반을 바탕으로 2020년부터 반도체 자급자족 및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플레이어 부상을 국가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2021년에 정부 조직인 ‘인도 반도체 미션(India Semiconductor Mission, ISM)’이 출범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에 100억달러 규모의 정부 보조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모디 수상의 출신 지역인 서부 구자라트주가 반도체 산업 육성의 중심이 되고 있다. 2025년 5월까지 ISM이 승인한 반도체 공장 건설 프로젝트는 모두 6건인데 미국 기업이 1건, 대만 기업이 3건, 일본 기업이 2건에 협력하고 있다.

미국은 2022년부터 인도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사의 반도체 조립 및 테스트(ATMP) 공장 건설이 인도정부의 반도체 관련 승인 1호다. 이는 미국 기술과 자본이 인도의 ‘반도체 입국’을 현실화하는 것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비중국 공급망’ 연계의 신호탄이 되었다. 마이크론은 구자라트주의 사난드에 약 27억50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실행하여 2025년 말 상업생산 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만은 인도를 ‘차세대 전략 파트너’로 간주하고 2022년 인도와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한 협력 강화를 발표했다. 2023년 타타 일렉트로닉스는 대만의 파워칩 반도체 제조사(PSMC)의 기술협력을 받아 구자라트주 돌레라에 28나노 공정을 갖춘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약 110억달러 투자로 2025년 가을 인도 최초의 상업용 메이드 인 인디아(Made in India) 칩이 생산될 예정이다.

인도는 28나노라는 범용 반도체 생산을 통해 비첨단 분야에서 안정적인 중간 기술 노드 생산 능력을 갖춤으로써 중국의 범용 반도체를 대체하는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TSMC의 경우 미국과 일본 외에 인도에도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는 것은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투자 규모가 적고 기술 인력 확보가 용이한 고급 후공정 테스트 베드나 R&D 협력을 놓고 인도정부와 협의하고 있다.

일본은 인도의 ‘반도체 입국’ 핵심 파트너로 급부상하고 있다. 2023년에는 일본 경제산업성과 인도 전자정보기술부가 공급망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일본정부는 인도의 반도체 교육·훈련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와 인도 CG 파워의 합작 법인이 구자라트주 사난드에 건설 중인 첨단 반도체 조립 및 테스트(ATMP) 공장이다. 2027년 본격 상업 생산을 목표로, 인도의 반도체 후공정 조립 역량 강화에 기여할 전망이다.

또한 인도의 타타 일렉트로닉스는 아삼주에 짓고 있는 대규모 반도체 조립 및 테스트 공장 건설을 위해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인 도쿄 일렉트론(TEL)과 협력을 합의했다.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가 타타그룹의 반도체 시설에 대한 자금 지원을 논의 중인 점도 주목된다.

이처럼 인도의 반도체 산업을 위해 미국대만 일본이 기술 장비 자본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경제협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인도-태평양 반도체 동맹’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 지정학의 신국면이다.

한국, ‘왜’라는 전략적 질문 던질 때

물론 이러한 협력이 완성된 전략동맹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략의 실효성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중국 기술진은 제재를 우회하며 최첨단 AI 반도체 핵심 기술까지 확보하면서 경쟁력 있는 자국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미국의 정책이 오히려 중국이 반도체 등 분야에서 자립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도 일본과는 장비·소재 협력 강화를, 미국과는 미국 내 생산기지 확대와 공동 R&D를 추진하며 대만에도 반도체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줄고 있다. 인도와는 2022년부터 반도체 산업 육성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를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하고 경제안보품목으로도 지정해 경제안전보장 관점에서 대응하고 있지만 지정학적 신국면에 대해서도 잘 대응해야 한다. 한국의 새 정부는 세계를 넓게 보고 ‘공급망과 기술의 블록화’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할 때다. 반도체 강국 한국은 이제 무슨 반도체(what)를 어떻게(how) 만드느냐보다 “왜(why) 만드는가, 무슨 목적으로 반도체를 만드는가”라는 전략적 질문을 화두로 던져야 한다.

이찬우

일본경제연구센터 특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