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의 화두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2025-06-13 13:00:03 게재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미국과 실리콘밸리는 무슨 생각을 했나

어머니 수술을 앞두고 고향을 오갈 일이 부쩍 늘었다. 서울에서 동해안의 한 소도시를 가려면 차로 세 시간 남짓 걸린다. 고속철을 타면 소요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지만 필자는 애써 버스를 고집한다. 어린 시절 서울을 갈 때면 늘 자동차로 구불구불 산맥을 넘었던 기억이 마음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해 4월부터 전국 고속버스의 와이파이가 개통된 덕에 노트북을 켜서 업무도 보고 책도 읽다가 졸음에 빠진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앨터스의 크리스트(Crist) 드라이브 2066번지를 찍었다. 1976년 4월, 이 차고지에서 애플이 시작됐다. 창업 초창기 개발한 개인용 컴퓨터 애플2의 슬로건은 “단순함이 궁극의 정교함이다”였다. 5년 후 이 슬로건을 매킨토시의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가 이어받는다. 사진 김욱진

“모두 안전벨트 매주세요.” 비몽사몽 정신을 차리는데 들리는 목소리가 낯익다. 20년 전 군생활을 함께한 방 병장의 음성과 흡사하다. ‘방 병장인가. 그럴 리 없겠지.’ 도착지에 내려서도 그의 명찰을 엿보려 주변을 서성거린다. 눈이 마주친 그가 묻는다. “욱진이 형?”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20년 전 시공간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필자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다가 짬을 내 30년 전, 40년 전 시공간을 찾아 나선다. 1980년대 후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1990년대 초반 다니던 초등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기만 했던 그때의 세상이 참으로 작아졌다는 사실에 축적된 세월을 응시한다.

문득 시간을 정지한 채 공간을 지구 반대편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미국과 실리콘밸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당시 서구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을까. 가장 손쉬운 접근법은 그때 현지에서 발간된 책을 살펴보는 일이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성장 다뤄

1988년, 한국에서는 서울올림픽이 한창일 때다. 미국 뉴욕 매디슨가 41번지에 위치한 링크스(Lynx) 출판사에서는 한 창업가에 대한 책을 발간한다. 책의 제목은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The Journey is the Reward)’다. 저자는 오랫동안 캘리포니아에서 테크놀로지 세계의 흥망성쇠를 취재한 저널리스트 ‘제프리 영’이다. 그는 1983년 창간한 애플의 기술잡지 ‘맥월드’의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초창기 애플을 근거리에서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성장을 다룬 책을 펴낸다. 물론 이 책은 잡스와 애플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제프리 영 스스로 비공식(unauthorized) 전기임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을 살펴볼 가치가 있는 까닭은 1980년대 미국 서부의 20~30대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세상을 만들어 나갔는지 엿볼 수 있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는 아쉽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다. 하릴없이 아마존에서 킨들로 전자책을 구해 필요한 부분을 읽어 나갔다. 우선 책의 제목인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는 말은 스티브 잡스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금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월터 아이작슨이 쓴 공인된 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럼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불교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도교로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노자의 도덕경 27장은 ‘선행무철적(善行無轍迹)’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우리말로는 “잘 걷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출판된 노자의 도덕경은 여러 판본이 있지만 밀리언셀러가 된 버전은 스테픈 미첼이 번역한 것이다. 시인이자 번역가인 스테픈 미첼은 한국의 숭산 스님 밑에서 수년 동안 선불교를 공부했으며 숭산의 가르침을 엮어서 책을 낸 이력도 있다. 그는 도덕경의 ‘선행무철적’을 영어로 “좋은 여행자는 정해진 계획이 없으며 도착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A good traveler has no fixed plans and is not intent upon arriving)”고 표현했다. 눈에 띄는 초월 번역이다. 어쩌면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를 가져와 이해하기 쉽게 풀려고 했다는 느낌도 든다.

매킨토시를 개발하며 내세운 구호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의 저자 제프리 영은 이를 불교의 화두(koan)로 본다. 그의 책을 보면 진리를 갈구했던 20대의 수행자 스티브 잡스는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나 ‘한 손으로 치는 손뼉은 무슨 소리를 내는가’와 같은 선불교 화두에 심취해 있었다. 이는 그의 개인적 관심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는 잡스가 매킨토시를 개발하며 내세운 구호다. 1982년 9월, 50명의 매킨토시 팀원들과 떠난 수련회에서 잡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여기 모인 50명이 하는 일이 우주 전체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겁니다.” 물론 잡스와 함께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고 매킨토시 팀원들은 “우주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신났던 일”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인다.

제프리 영은 스티브 잡스를 대담한 미국인으로 규정한다. 또한 미국 기성세대에 대해 강력한 반문화적 반감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잡스는 수행의 깨달음을 일상, 다시 말해 자신의 비즈니스로 연결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수행과 비즈니스의 경계를 허물고 하루하루를 최대한 꽉 채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프리 영에 따르면 20대의 잡스는 매일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 선(禪)’ 혹은 ‘선(禪)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미국 서부에서 탄생한 독창적 선 수행자로 ‘하이브리드 선사(hybrid Zen master)’나 다름없었다. 애플은 그의 실험 무대였다.

그렇다면 잡스가 애플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비즈니스 선’이란 무엇일까. 애플의 435호 직원이자 매킨토시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했던 앤디 허츠펠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잡스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설계팀에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독려했어요. 경쟁에서 이기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것, 혹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어요.” 어느 날 잡스는 매킨토시 팀을 데리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아 루이스 티파니의 유리 제품 전시회를 관람한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위대한 예술품을 만드는 사례를 루이스 티파니에서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매킨토시 팀은 단지 수익을 올리는 제품이 아닌 우주에 흔적이 남을 만한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는 잡스의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잡스에게 ‘비즈니스 선’이란 진리를 담고 있는 온전한 전자기기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애플 매킨토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위대한 예술품이 되어야만 했다.

애플 통해 구현하려 했던 ‘비즈니스 선’

자신을 예술가로 규정하고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하려는 시도는 1980년대 미국 서부의 기술기업 창업자에게만 해당되는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출판되어 수백만 부가 팔린 책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줄리아 캐머런은 1992년 ‘아티스트 웨이(The Artist’s Way)’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캐머런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창조성이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번잡한 일상, 주변의 시선, 혹시 받을지 모르는 상처와 두려움 때문에 창조성을 가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가진 재능 중 극히 일부밖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캐머런은 내면에 있는 창조성을 끄집어낼 때 질적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한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삶과 예술을 분리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이 실용적 책은 출간 직후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500만 부 이상 팔렸다. 이는 이미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이 비즈니스와 직업 세계에서 신성(sanctity)과 예술성을 구현하기 위해 대단히 진지한 자세로 접근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미국 실리콘밸리 근무 3년 동안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필자는 뒤늦게 한국에 오고 나서 많은 사료를 발굴하고 있다. 물질주의라는 단편적 시각과 제도·지식·자본의 관점에서만 미국과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바라보려 했던 자신의 편협함을 성찰하게 된다. 늦었지만 시공간을 지금, 여기로 옮겨야 할 시점이다. 여정 자체가 보상이라는 어느 창업가의 말, 직업을 포함한 자신의 일상에서 신성을 발견하라는 어느 예술가의 조언. 이는 2025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