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한번도 본 적 없는 세상

2025-06-17 13:00:14 게재

살아오며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색상을 처음 보는 기분은 어떨까? 영화 ‘아바타’의 무대인 판도라를 처음 방문한 지구인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느낌일까?

이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소재로 삼은 소설도 있다. 1927년 러브크래스트가 발표한 단편 소설 ‘우주에서 온 색채(Color Out of Space)’에선 인간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인간의 감각 밖의 색채를 내뿜는 운석이 일으키는 공포와 비극이 묘사된다. 2019년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맡았던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란 영화로도 각색된 이 소설은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색채를 무기로 삼는 외계 존재라는 특이한 설정으로 코즈믹 호러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색채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평상시에는 죽을 때까지 느낄 수 없는 색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은 삶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놀랍게도 최근 미국의 한 연구그룹이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인간이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색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빛의 색은 눈이 지각한다. 따라서 이 연구를 이해하려면 눈의 구조와 인간이 색을 느끼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

특정 세포만 자극해 느껴보지 못한 색상 구현

바라보는 대상의 상이 맺히는 눈 속 망막에는 두 종류의 시각세포가 있다. 어두운 밤에 희미한 빛을 감지하는 막대세포와 밝은 환경 아래 작동하는 원추세포가 그것이다. 한 종류만 존재하는 막대세포가 희미한 빛의 명암만을 처리하는데 비해 가시광선에서 서로 다른 감도를 갖는 세 종류로 구성된 원추세포는 밝기에 더해 색상까지 느낄 수 있게 한다.

파란색 녹색 그리고 빨간색 대역에서 각각 감도가 제일 높은 원추세포를 순서대로 S M L이라 부른다. 약 380nm에서 시작해 780nm에서 끝나는 가시광선 파장 대역에서 짧은(Short), 중간의(Medium), 그리고 긴(Long) 파장 대역에서 감도가 제일 높다는 사실을 S M L란 이름이 함축하고 있다.

눈에 입사하는 빛이 세 원추세포를 자극해 만드는 신호가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고 처리되어 우리가 느끼는 색 지각이 형성된다.

뇌의 색 지각에 활용되는 S M L 세포의 신호는 세 원추세포의 감도곡선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이 세 감도곡선들은 가시광선 전체에 있어 상당히 넓은 파장 범위에서 서로 겹친다. 가령 543nm의 단색광은 보통 연녹색으로 보이는데, 이 파장의 빛은 M과 L 원추세포를 동시에 자극할 수밖에 없다.

뇌가 느끼는 녹색은 543nm 파장의 빛으로 자극된 M과 L 세포의 신호를 뇌가 해석한 결과다. 만약 이 파장의 빛으로 가령 M 세포만 골라서 자극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인간이 느끼는 색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해당 연구팀의 연구동기였다.

연구팀이 활용한 방법은 실험대상이 된 사람들의 안구운동을 추적해서 특정한 종류의 원추세포만 타깃으로 레이저를 쏘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특정 원추세포만 자극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인간이 느끼는 시각을 바꿀 정도로 면적이 넓지 않았다.

본 연구의 피험자들은 543nm 파장의 레이저로 M세포만 자극되었을 때 이전엔 보지 못했던, 극단적으로 채도가 높은 청록색을 경험했다. ‘올로(Olo)’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이 청록색은 평상시 인간이 느끼는 색상의 범위를 벗어난 색으로 자연적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색이다. 피실험자들은 올로에다 백색광을 적당히 섞어서 채도를 의도적으로 낮추어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청록색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개념이 디스플레이 탄생 가능성

이 기법을 기반으로 다른 단색광을 선택해 특정 원추세포만 자극한다면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색들을 인간이 지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현재는 특수한 방법으로 망막을 스캔하고 레이저를 조사할 수 있는 첨단 안과장비를 이용해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미래에 이런 장치가 소형화되어 보급된다면 새로운 개념의 디스플레이도 탄생할 수 있다.

가령 가상현실(VR)용 헤드셋에 이런 장치가 들어간다면 기존의 어떤 디스플레이도 구현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색상을 경험하는 패러다임이 열릴 지도 모른다.

인간이 지각하는 스펙트럼의 밖에 있는 색에 기반해 ‘우주에서 온 색채’를 썼던 러브크래스트의 상상력은 한 세기가 지나서 현실이 되었다. 그의 상상 속 색은 공포와 파멸을 일으켰지만 이번에 발표된 최신 연구는 인간의 지각 범위를 벗어나는 색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기술과 예술, 첨단 안과치료의 지평을 열 것이다.

고재현 한림대학교 교수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