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기술 아닌 미래를 보는 눈이 먼저다
정부가 대통령실에 ‘인공지능(AI) 수석’을 신설하고 이공계 연구자에 대한 지원 확대 방침을 밝히자 과학계는 연구개발(R&D) 활성화에 대한 기대에 들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위기들이 과학기술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농업 분야는 더욱 그렇다.
지금 한국 농업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기술부족이 아니다. 기후위기에 따른 생산 불안정, 농작물 피해보상 수준, 식량 공급망의 지정학적 리스크, 식량안보와 태양광 발전 사이의 갈등, 높은 농산물 가격과 낮은 농가소득 사이의 괴리 중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술개발을 만능 해법처럼 기대한다.
정부는 매년 다양한 농업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2025년 농림식품 분야 연구개발 예산은 이미 1조원을 훌쩍 넘어섰다. 전국 연구기관과 대학에서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고 있지만 농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정작 쓸 만한 기술은 없다”고 한탄한다.
전체 농가의 절반 이상이 1500평 이하의 경작지를 운영하는 영세농에 머물러 있어 첨단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 구조개혁 없는 기술투자는 마치 뿌리내릴 흙 없이 씨앗만 흩뿌리는 일과 같다.
정책 방향의 혼선도 문제다. 전업농 육성과 규모화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소농 지원을 확대한다. 스마트농업은 요란한 성과 홍보에 비해 현장 확산은 미미하다. 비효율적인 농지제도, 영세농 위주의 구조, 구시대적 기술지원 체계 등 구조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 와중에 전략 없는 기술 중심 정책이 반복되며 혼란만 가중된다.
독일의 사례에서 배우는 농업의 미래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명확한 ‘방향’이다. 농업이 어떤 미래를 지향할지 사회적 합의부터 우선돼야 한다. 식량안보를 위해 농업을 공공재로 육성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 중심 산업으로 전환할 것인가. 농촌 공동체 유지와 식량안보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이 점에서 독일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독일정부는 2020년 ‘농업미래위원회’를 구성해 농민 환경단체 소비자 연구자 정치인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는 숙의과정을 거쳐 ‘2030 농업전환 로드맵’을 수립했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과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설계된 전략이다.
특히 독일은 과학기술 연구 못지않게 전략연구에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한다. 기후·에너지·농업·산업 전환 등 복합위기를 다루기 위해 정책 시나리오, 시민 수용성, 분배 정의, 제도 설계까지 포괄하는 전략연구를 수행한다. 대표적 사례가 아리아드네(Ariadne)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3000만유로의 예산을 들여 기후중립 시나리오와 사회전환 전략을 연구했다. “기술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독일의 철학은 기술과 사회를 함께 설계하는 데서 시작한다.
반면 한국은 전략 설계를 뒷받침할 사회과학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농업구조와 정책 효과, 농민행동 변화 등 복합적 요소를 다루는 인문사회 연구는 거의 수행되지 않고 있다. 2023년 기준 인문사회 R&D 예산은 전체의 2%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위원회를 구성한다 해도 피상적 논의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촉발하기도 한다.
농업 R&D도 마찬가지다. 미래전략 수립을 위한 중장기 연구는 드물고 대규모 R&D 사업이 시작될 때마다 단기용역으로 전략을 급조하는 식이다. 농업 구조개혁이나 농식품 산업 생태계에 대한 본격 연구는 사실상 부재하다. 농업의 미래 전략을 연구해야 할 농촌경제연구원의 R&D 예산은 17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농식품부의 하청기관처럼 기능한다는 비판까지 있다.
농업문제 해법은 전략적 통찰에서 시작
우리는 지금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전략 없는 기술투자로 계속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농업의 미래를 재설계할 것인가. 농업은 단순한 기술 산업이 아니다. 농지제도, 유통구조, 노동력, 지역 공동체, 글로벌 공급망 등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힌 복합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설계하려면 연구자뿐 아니라 정치학자 사회학자 경영학자 농업경제학자 등 다양한 사회과학 전문가의 협업이 필요하다.
이제는 기술 중심의 접근을 넘어 농업의 미래 전략을 세우고 이를 뒷받침할 인문사회 기반 연구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기술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고 해법은 전략적 통찰에서 시작된다. 한국 농업 위기의 해법은 눈앞의 기술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