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플라스틱도 반도체가 된다고?
플라스틱(plastic)은 형상이 변할 수 있다는 ‘가소성’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합성수지를 부르는 일반명사로 쓰인다. 합성수지는 종류와 성질이 매우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전기를 통하지 않는 절연체이고 탄소를 많이 함유하는 유기 고분자 물질이다. 수도관 같은 곳에 많이 사용하는 PVC가 대표적이다.
197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히거, 맥디아미드, 시라카와 등은 폴리아세틸렌이라는 폴리머 플라스틱이 반도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실리콘 반도체에서와 유사하게 적당한 불순물을 섞어서 도핑(doping)을 하면 전기 전도도가 무려 10^11배나 증가한다는 것도 발견한다. 이는 전기가 가장 잘 통하는 은이나 구리보다는 못하지만 전기가 꽤 잘 흐르는 금속인 스텐레스(stainless steel) 보다는 수백배 전기가 잘 흐르는 것이다. 플라스틱이 금속처럼 전기를 잘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로로 이 세 사람은 200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이 발견을 계기로 전기가 잘 통하는 플라스틱으로 금속 전선을 대체하려는 꿈이 있었으나 도핑된 폴리아세틸렌은 화학적 내구성이 부족해 실제 전선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차원 고분자 사슬과 같은 유기물에서 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기초 연구를 통해서 저차원 물질의 전기 전도체의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나은 성질의 고분자를 합성하여 반도체 재료로 사용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플라스틱으로 반도체 소자 만드는 꿈 이뤄져
1986년에는 일본 미쓰비시 전기의 연구원 안도(T. Ando)등이 폴리티오펜 고분자를 이용해서 트랜지스터를 만들었고, 1992년에는 프랑스 CNRS 연구소의 호로비츠(G. Horowitz)가 펜타센이라는 저분자 물질의 박막을 이용하면 비정질 실리콘보다 성능이 좋은 트랜지스터를 유기물로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한편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프렌드(R. F. Friend) 교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전기가 통하는 고분자 물질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프렌드 교수의 지도를 받던 대학원생 버로우지즈(J. Burroughes)는 1990년에 PPV라는 고분자 물질 박막에 전류를 흘리자 황록색의 빛이 나오는 현상을 발견한다. PPV도 폴리아세틸렌과 유사하게 반도체 성질을 가지는 공액고분자 물질이다. 이보다 앞서 1987년에 필름 회사인 코닥의 연구원 탕(C. W. Tang)과 반슬라이크(S. Van Slyke)는 저분자 유기물 박막에 전류를 흘려주면 빛이 나오는 현상을 논문으로 발표한다.
이로써 유기물질로 금속에 못지 않게 전기가 잘 흐르는 전도체를 만들 수 있고, 트랜지스터와 같은 반도체 소자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류를 흘려서 빛을 내는 LED 같은 반도체 발광소자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리콘이나 갈륨비소와 같은 무기 반도체와는 달리 유기 반도체는 내구성이 좋지 않아서 강한 전류나 빛, 혹은 산소등에 노출되면 특성이 변화하기 때문에 본격적 실용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장점을 가지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디스플레이 소자다. 실리콘은 전자 구조 때문에 발광 소자로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갈륨비소나 질화갈륨 같은 물질로는 뛰어난 발광소자를 만들수 있지만, 수천만개의 작은 픽셀이 모두 완벽하게 작동해야 하는 디스플레이에 사용하기에는 엄청난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
이에 비해 탕과 반슬라이크의 저분자 유기 발광 물질은 미세한 구멍이 뚫린 마스크를 사용하여 진공 증착을 하면 디스플레이의 작은 픽셀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에 초기부터 LCD를 대체할 평판 디스플레이에 응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늘날 스마트폰이나 TV에 널리 사용되는 OLED 디스플레이가 이렇게 개발된 것이다. OLED 디스플레이는 우리나라 전자 산업을 이끌고 있는 DRAM이나 LCD 디스플레이와는 달리 우리가 최초 양산에 성공하여 세계 전자 산업의 큰 줄기 하나를 만들어냈다는 의의도 있다.
완벽한 물질 찾는 과학자 노력 계속되는 이유
OLED 디스플레이는 매년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사용되는 유기 반도체 물질과 소자 구조가 바뀐다. 무기 반도체와는 달리 유기 반도체는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매년 새로운 물질을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성능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특성을 가진 새물질을 발견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자들의 이 완벽한 물질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