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실용’이 여는 세계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든 동력은 국민의 양심과 상식에 바탕을 둔 ‘실용’의 힘이었다. 이때의 실용주의는 미국에서 태동한 철학적 입장 프래그머티즘 (Pragmatism)과는 달리 사물과 세계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가리킨다. 또 이용후생, 경세치용 등이 떠오르는 실학의 전통적 의미와도 다소 다르다.
실용주의는 어떤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고착한 이념이나 원칙 등을 부차적으로 보는 태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속전속결 성과만 내면 되는 ‘업적주의적’ 실용주의는 역사적으로 세상을 바꾼 실용의 힘과 구분되어야 한다. 박정희의 ‘하면 된다’나 정주영의 ‘해봤어?’는 불가능성을 뒤집어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위대한 업적임이 분명하지만 부작용을 빚어냈다. 성과와 그늘의 양극단을 만드는 실용은 이 시대에 부각하는 그 실용이 될 수 없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천출을 기용한 과학 기구 발명, 판옥선 13척 만을 가지고 물때 물길을 이용한 효율적 전술로 133척 일본 함대를 물리친 이순신의 애국 애민이 있었다.
온 국민이 대동단결한 3.1 만세와 좌우합작의 신간회 운동은 일제 강점 체제의 뿌리를 흔들었다. 과격하고 경직된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 대통령 직선제 쟁취 요구로 단결한 6월 항쟁 역시 실용의 가치가 빛난 우리의 역사로서, 반동을 물리치고 7개월 만에 회복한 민주주의 정치의 근간을 만들었다.
한국을 새롭게 만든 동력 ‘실용’의 힘
미국은 1920년대 이념을 초월한 마셜 플랜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중국에서는 항일 시기 2차에 걸친 국공합작과 1980년대 흑묘백묘의 실사구시 정신으로 민족적 위기와 꽉 막힌 사회주의 모순을 돌파했다. 같은 시기 러시아는 실용과는 거리가 먼 편향된 자본주의 실험으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냉전의 종식을 가져와 세계에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동서를 막론하고 실용의 가치는 위기에 직면한 민족과 국가를 살리며 역사의 고비를 넘겼고, 그 중요성을 오늘에 다시 일깨우고 있다.
진정한 실용은 사람을 위하는 형평과 평화를 중시해야 한다. 한국 양명학의 개념을 빌리자면 실심실용(實心實用)이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백암 박은식 선생은 사람의 양지(良知)로 천지만물이 일체가 되는 세상을 역설하며, 대한민족이 경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선 실사(實事), 실공(實功), 실효(實效)의 문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길이 평탄한지 몸소 걸어보아 알고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사욕을 제거하고 공적 이익에 복무하여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자는 대동(大同)사상을 주창했다.
산업사회에 일찌감치 들어서고 외교와 경제교류가 전쟁을 대신해야 할 시대에 이르렀음에도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포성이 들리고 군사쿠데타와 같은 체제 폭력이 끊이질 않고 있다. 권위주의와 관념론이 실용을 압도하고, 다수의 선량한 국민이 양극단으로 대립하는 국내외 진영 정치의 위협 아래 놓여있다. 트럼프가 주도하는 미국은 한 손에는 관세 폭탄, 다른 한 손에 미사일을 들고 여전히 세계를 협박하고 있다. 네타냐후라는 전쟁주의자에 의해 가자지구 주민들은 학교와 주거 건물, 피난처의 구호품 배급소에서 폭격을 당해 수백 명씩 죽어 나가며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또다시 폭격하고, 북한은 그런 러시아에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이 땅에서도 지배권력이 북한을 의도적으로 자극하여 전쟁 도발을 유도한 실험이 오갔다는 경악할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정세 아래 한국의 외교와 안보, 국제정치가 놓여있다. 국민의 안전과 국익이라는 실용적 잣대 외에는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국내 정치 또한 국민을 지역으로 나누고 진보와 보수, 남녀, 나이로 갈라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
진영 정치의 위협 슬기롭게 극복해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자동차는 전후좌우 바퀴로 앞으로 나아간다. 형평과 안정 없이는 무엇도 전진할 수 없다. 한편으로 치우친 진보와 보수는 바퀴를 구동하는 엔진이 될 수 없다. 구악을 물리치고 새 장을 펼치고자 하는 지금이야말로 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 생활 현장에서 실용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