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작고 안전한 원자로’는 에너지의 미래인가

2025-07-11 13:00:01 게재

원자력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작아진 원자력, 즉 ‘소형원전’을 말한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았다. 그로 인해 인류는 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AI는 엄청난 전기를 먹는 하마라는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다. 그 전력은 결국 ‘무언가’에서 끌어와야 한다. 이 무언가가 문제다. 사실 이 시점에서 AI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전기다.

AI의 식량인 빅데이터는 인터넷 데이터센터(IDC)에 저장된다. IDC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AI 연산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디지털 발전소’다. 그런데 이 IDC가 소비하는 전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반적으로 IDC는 국가 전체 전력의 3% 이상을 소비한다. AI가 더 고도화될수록 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래서 글로벌 AI 강국들은 기술보다 전력 확보 경쟁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전력 확보를 위해서는 시간과 땅, 비용,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태양광은 넓은 면적을 요구하고, 풍력은 간헐적이며, 수소는 아직 원가 부담이 크다. 결국 인간은 다시 익숙한 풍경으로 되돌아온다. 원자력발전이라는 오래된 답안지를 다시 펼쳐드는 것이다.

AI 강국들, 전력확보 위해 원자력 소환 중

소형모듈원전인 SMR(Small Modular Reactor)과 MMR(Micro Modular Reactor)은 말 그대로 작고 조립 가능한 원자로들이다. 이 들은 기후위기와 전력대란, 그리고 AI가 요구하는 거대한 전력 수요를 핑계로 재등장하고 있다.

체코는 새로운 원전 입찰에 나섰고, 두산에너빌리티는 한국형 SMR 기술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춤을 췄다. 폴란드 루마니아 캐나다 사우디 영국까지 모두가 ‘작고 안전한 원자로’라는 서사에 빠져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정말 미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미완의 약속인가?”

SMR은 천문학적 비용과 긴 건설기간, 지역민 반발, 안전성 우려가 있는 기존 대형 원전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공장에서 미리 조립한 뒤 현장에서 모듈처럼 설치할 수 있고, 작은 단위로 분산 배치가 가능하다. 게다가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으니 기후위기 시대에 딱 맞는 솔루션처럼 들린다.

그러나 기술은 말보다 느리다. 2025년 현재상용화된 SMR은 아직 단 하나도 없다. 미국의 ‘NuScale’은 상장 후 수년간 프로젝트 일정을 연기했고, 한국형 i-SMR은 설계 승인 단계일 뿐이다. 고온가스로 기반의 MMR은 여전히 실험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미 만들어진 기술’이 아니라, ‘이제 막 설계서에 올라간 그림’인 것이다.

모든 판단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인간은 조급하고 기술은 느리다. 원전이 작아졌다고 해서 더 안전해진 것도 아니다. 소형화는 구조의 단순함을 가져오지만 원자력이라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방사성 폐기물, 계통 안정성, 사회적 문제 등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경제성도 문제다. 단위 출력당 건설 비용은 오히려 더 높을 수 있으며, ‘규모의 경제’를 포기한 채 수익성을 담보하는 모델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 기술에 눈을 빼앗기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지금 우리 모두가 속도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에는 시간이 없고, AI가 요구하는 전력은 국가 하나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신속하고 강력하며 탄소 없는 전기’라는 주문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이 지금은 SMR 말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술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우리는 지금, 두 개의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다. 핵 없는 에너지 자립의 미래와 더 작고 더 정교해진 핵 기술에 의존하는 미래다. 선택은 어렵고 무엇이 정답일지 그 누구도 모른다.

더 작고 더 정교한 핵 기술에 의존하는 미래

그래서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누가 통제할 수 있는가? 그 대가는 누가 치를 것인가? SMR은 단지 가능성이다. 그래서 아직 그릇으로 빚어지지 않은 찰흙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그 찰흙에 미래라는 이름을 새기려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이름을 새기기 전엔 정말 이 그릇이 쓰일 수 있는 것인지 먼저 두드려봐야 하지 않을까.

윤경용 페루 산마틴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