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확신의 시대에 과학이 말하는 것
우리는 매일 아침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본다. 밤하늘의 별들은 계절마다 익숙한 자리를 지키고, 계절은 어김없이 순서를 따른다. 이렇게 반복되는 세상의 움직임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익숙한 규칙, 익숙한 결과, 익숙한 세계. 우리는 그렇게 ‘확신’을 쌓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확신을 좋아한다. 뚜렷한 어조로 말하는 사람에게 끌리고, 명확한 해답을 주는 전문가를 신뢰하고, 확신에 찬 지도자를 믿고 따른다. "아마도”보다는 “틀림없이”가, “가능성이 있습니다”보다는 “확실합니다”가 우리를 안심시킨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과 삶에서 선명한 판단, 뚜렷한 해답은 때때로 진실보다 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런데 확신은 위험하다. 확신은 질문을 멈추게 하고, 의심을 불필요하게 만들며, 틀렸을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게 만든다. 한 번 굳어진 믿음은 설령 그것이 틀렸다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되는 증거를 애써 부정하거나, 모순을 꿰맞추며 더욱 단단해진다.
그래서 과학자는 확신을 경계한다. 확신이 한 번 자리 잡으면, 새로운 관찰도 그 틀 안에서만 해석된다. 모순은 외면되고, 질문은 줄어든다. 과학이 멈추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믿어온 것’이 과연 옳은가, ‘분명해 보이는 것’이 정말 분명한가. 과학자는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열어두는 사람이다.
과학자는'확신'을 경계하는 사람
한때 인류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해와 달과 별들이 그 둘레를 돈다고 믿었다. 천동설은 단지 하나의 우주 이론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였고, 신의 설계였으며, 눈으로 본 감각과도 일치하는 ‘확실한 진실’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혹시, 지구가 도는건 아닌가요?” 이 질문은 기존의 믿음을 흔들수 있었지만, 당시의 감각과 직관에 반했다. “만약 지구가 돌고 있다면, 우리는 왜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가?” “하늘은 왜 매일 똑같이 움직이는가?” 그 질문은 오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애 대부분을 침묵 속에 지냈고, 죽기 직전에야 지동설을 담은 책을 조심스럽게 세상에 내놓았다. 그 조용한 물음은 과학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들어 하늘을 관찰했고,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에서 수학적 질서를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뉴턴이 만유인력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의심을 하나의 체계로 설명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까지 백년이 넘는 시간과, 셀 수 없이 많은 질문과 실험을 거쳐야 했다. 확신 하나를 의심하는 데, 여러사람의 생애가 필요했다.
과학자는 오늘도 확신을 경계한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반복하는 모든 과정은 “내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언제든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확신하지 않기 위해서 써내려가는 수식 그리고 증명, 틀릴 가능성을 품은 채 시도하는 실험과 계산, 과학은 확신을 보류하기에 정직할 수 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과학이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다” 라고 말했다. 그는 단정적인 언어 대신 질문을 사랑했고, 모든 설명은 임시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아인슈타인도 고백했다. “나는 언제든 틀릴 준비가 되어있다.” 천재라 불리던 그 조차도 진실 앞에서는 겸손했다. 이들에게 과학이란 믿음의 선언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정과 검토, 그리고 끝없는 ‘다시 생각하기’의 연속이었다.
이 태도는 비단 과학에만 필요한 것일까? 작금의 우리는 모두가 자신 있게 말하고, 단호하게 결론내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선택은 빨라야 하고, 의견은 강해야 하며, 머뭇거림은 무능처럼 보이기도 한다. “잘 모르겠다” 는 말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기후변화, 인공지능, 전염병, 우주개발등 단일한 해답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재한다. 어쩌면 우리가 확신을 갈구하는 것은 복잡해지는 문제에 대해 간절히 답을 원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정답이 존재하던 시절은 이미 예전에 지나갔는데, 우리는 더 강력하게 서로에게 정답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확신을 유예할 수 있는 지적 절제 필요한 때
그래서 더더욱, 단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질문을 붙잡고, 의심을 품고, 틀릴 가능성을 열어두는 용기. 과학자가 오래도록 지켜온 이 태도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자세인지 모른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어떤 질문 앞에 서 있는가?’ ‘확신 대신 의심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과학이 연구실안에서 지켜온 이 태도는, 이제 사회 전체의 사고방식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복잡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확신이 아니라, 그 확신을 유예할 수 있는 지적 절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