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

과학에서 SF까지, 출판의 길을 열며 나아가다

2025-07-17 13:00:01 게재

2024년 ‘허블도서전’에 1천명 넘는 독자들 방문 … ‘히포크라테스’ 브랜드로 의학 분야까지 확장

한국에서 과학 대중서와 SF 문학의 흐름을 말할 때, 동아시아 출판사는 빠지지 않는다. 출판 경력 없이 40세에 출판사를 창업한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는 당시 출판계에선 낯설던 과학 분야에서 가능성을 발견했고 SF라는 상상의 장르를 열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왔다. 15일 한 대표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카페허블&남산책방에서 만났다.

한 대표는 한국 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 출판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였기에 새로운 분야를 찾아야 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일본에서 접한 과학책들을 떠올렸고 그 책들이 단순한 학습서가 아니라 재미있는 읽을거리였음을 기억해냈다.

사진 이의종

◆과학 대중화의 시작 = 한 대표는 “교보문고 과학 분야에 가봤더니 읽을 만한 책이 하나도 없고 학습서 수험서 교재뿐이었다”면서 “일본 생활을 토대로 과학책이 재미있고 시장성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경쟁자가 없어 진입장벽이 낮겠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과학 분야에 도전장을 내민 이후, 동아시아는 국내 저자 찾기에 나섰다. 2000년 초반 당시 신생 출판사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등 해외 저작권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던 선택은 오히려 동아시아에 기회가 됐다. 동아시아는 국내 과학 분야 저자를 찾아내 과학에 인문학과 사회학 등을 더하며 글쓰기의 지평을 넓혔고 이는 독자들의 호응으로 이어졌다.

한 대표는 당시 ‘한글 세대’의 등장을 중요한 기회로 봤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세대는 학교에서 정규 한글 글쓰기 교육을 받은 첫 세대”라면서 “그들은 과학책도 잘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SF와 허블의 실험 = 과학의 인문사회학적 의미를 확장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게 SF로 이어졌다. 그는 ‘문자 언어’로 과학의 질문을 풀어내는 가장 적절한 장르로 SF를 택했고, 이를 위해 SF 전문 브랜드 ‘허블’을 창립했다.

한 대표는 “과학을 문자 예술로 구현하는 장르는 SF”라면서 “한국에도 SF는 존재했지만 아직 시장이 폭발하기 전 단계였고 동아시아는 결정적 시기에 진입하며 SF 장르의 확산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허블은 최근 주목받는 작가들을 배출하며 SF 문학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동아시아가 운영하는 한국과학문학상은 SF 작가 발굴에 대표적 역할을 했다. 한 대표는 “대한민국에서도 수준 높은 SF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최근 동아시아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통해 의학 생명과학 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한 대표는 “요즘 의사들이 글을 잘 쓰고, 의학은 인간과 삶을 다루는 풍부한 담론의 원천임에도 흥미로운 콘텐츠는 아직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팬덤과 매출로 증명된 브랜드의 힘 = 허블은 단순한 장르 출판을 넘어 팬덤을 형성한 브랜드가 됐다. 2024년엔 본사에서 3일 동안 ‘허블도서전’을 열었고 1000명이 넘는 독자가 출판사를 방문했다.

한 대표는 “서울국제도서전처럼 허블 책만으로 전시를 꾸몄다”면서 “허블 브랜드 하나로 충분히 독자와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올해 참여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선 동아시아가 매출 상위권에 오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 대표는 “20~30대 여성 독자들이 허블 콘텐츠에 몰렸고 매출로 나타났다”면서 “브랜드의 방향과 시장의 감각이 잘 맞아떨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허블의 팬덤은 독자들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한 대표는 “허블처럼 출판사가 알려지면 투고가 많아져 일일이 답장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허블은 모든 투고자에게 성의껏 답장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결국 읽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읽지 않는 시대, 책의 미래는 =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가 지배하는 가운데 책이 과연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묻는 시대다. 한 대표는 책을 ‘고통스러운 해독의 예술’이라 표현하며 언어는 여전히 사유의 도구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책은 기호뿐인 문자를 독자가 해석해야 하는, 가장 불편한 예술 장르”라면서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 국민의 10%만 책을 읽는 시대이며 그 10%를 위한 책은 더 정교하고 더 깊어져야 한다”면서 “앞으로는 언어를 더 벼리고 밀도 있게 구성해 정수를 뽑아낸 책만이 존재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동시에 그는 문자 언어가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새로운 방식 역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한 대표는 “한국 작가들은 정말 신기한 이야기를 상상해내는 재능이 있다”면서 “중요한 건 그 상상력을 어떻게 문자로 풀어낼 것인가, 어떻게 문학적 형식으로 확장할 것인가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출판 역시 드라마와 영화처럼 상상력을 구현하는 창작 산업”이라면서 “출판 분야에 이야기를 설계하고 기획하는 ‘언어 크리에이터’가 필요한 시대”라고 덧붙였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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