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파르시 수업과 점의 연결
이베이 창업의 성공 배경, ‘언어적 재능’과 ‘문화적 감수성
호세이니는 잘 있을까. 벌써 12년 전 일이다. 이란 테헤란에 처음 근무하러 갔을 때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려 해도 돈을 안 받겠다고 하고 택시를 타도 돈을 안 받겠다고 한다. 얼마냐고 물으면 항상 돌아오는 말은 “거벨리 나더레(Ghabeli nadare)”였다. 직역하자면 “이 물건은 당신에 비해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라는 뜻으로 “돈 받기가 좀 그러네요”라는 의미다.
물론 빈말이다. 돈을 내지 않고 간다면 상점 주인이 쫓아올 것이다. 알쏭달쏭한 이란에 하루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언어부터 익혀야 했다. 테헤란대학교 페르시아어 연구소인 ‘데흐코다’를 통해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그의 이름은 호세이니였다.
호세이니와의 페르시아어, 아니 파르시(Farsi) 수업이 시작됐다. 우리는 매주 두세 번씩 아침 7시쯤 만나서 교습을 진행했다. 꽤나 강도가 높았던 파르시 수업에서 필자는 무엇보다 언어를 통해 이란 사람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고 싶었다.
8년 동안 중동 특파원을 역임한 뉴욕타임스 기자 마이클 슬랙만은 2006년 8월 테헤란에서 뉴욕으로 송고한 기사에서 파르시를 ‘정교한 감추기 예술(The Fine Art of Hiding)’에 비유했다. 정교한 감추기 예술의 대표적 사례는 파르시 사용자들의 언어 습관인 ‘터로프(Taarof)’다. 터로프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서 서로의 체면을 지키는 사회적 관습이다. 앞서 살펴본 “거벨리 나더레”와 같은 빈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터로프 표현이다.
이란에서는 언어의 80%가 함축적 의미
컬럼비아대학에서 강의하는 이란계 미국인 학자 ‘키안 타지바크슈’는 파르시의 기능이 영어를 비롯한 서구어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서구에서는 언어의 80%가 명확한 의미를 갖지만 이란에서는 언어의 80%가 함축적 의미를 품고 있다. 이는 풍부하고 시적인 파르시 고유의 언어 문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외국인 입장에서는 파르시 사용자의 다차원적이고 미묘한 의도까지 이해하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테헤란대 국제관계학 교수 나세르 하디안은 아예 “상징성과 모호함이 파르시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2006년 뉴욕타임스의 슬랙만 기자는 “파르시 사용자가 익숙한 맥락과 영어 사용자가 익숙한 맥락은 분명히 다르다”며 “미국인이 이란인의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는 일은 이제 필수적”이라고 썼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호세이니와 함께한 파르시 수업은 5년간 지속됐다. 귀국 전날까지도 교습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파르시를 배우느냐고 물었다. 어떤 용도를 염두에 두고 언어를 배운 것은 아니다. 2025년 에스놀로그(Ethnologue) 통계에 따르면 방언을 제외한 페르시아어 사용자는 8300만명으로 세계 언어 중 27위다. 한국어는 8200만명으로 28위를 기록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한국어를 배우는 이에게 한국어를 어디에 쓰려고 배우느냐고 힐난한다면 한국어 모국어 사용자로서 대단히 안타까울 것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파르시를 배웠다. 이왕 이란에 있는 동안 이란을 더 알고 싶었을 뿐이다.
파르시 공부가 빛을 본 곳은 공교롭게도 미국이다. 두 번째 근무지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2022년 6월 다운타운 새너제이에서 열린 메타버스 콘퍼런스에서 연사로 나선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은 ‘푸네(Pouneh)’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혼합현실(MR)을 담당하는 관리자였던 그는 필자의 눈에 이름부터 외모까지 딱 봐도 이란계였다. 그의 발표가 끝나고 명함을 주러 가서 파르시로 말을 건넸다. “아즈 디단 에 쇼마 헤일리 호시박탐(만나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동아시아 출신 한국인이 테헤란에서 5년을 거주했고 페르시아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에 커다란 호기심을 드러냈다.
차츰 업무를 하며 빅테크 기업에 다니는 사람을 연사로 섭외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이란계 미국인을 십분 공략했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는 시애틀에 거주하던 푸네는 비행기를 타고 기꺼이 새너제이까지 와주었다. 별도의 연사비도 받지 않는 이란식 환대(Iranian hospitality)를 보여준 건 파르시 구사자에 대한 덤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며 자연스레 이란계 미국인 창업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이란계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베이(eBay)’를 창업한 피에르 오미디야르다. 2025년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Bloomberg Billionaires Index)에 따르면 오미디야르의 자산은 131억달러다. 그는 이란 출신 인물을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했다.
이베이 창업으로 부 축적한 오미디야르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이 신화를 내세우지만 이베이의 이야기는 거실에서 시작된다. 1995년 9월 3일 새너제이의 자택 거실에서 주말 내내 개인용 컴퓨터로 코딩에 몰두하던 28세 프로그래머 오미디야르는 ‘정직하고 개방된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겠다’는 목적으로 온라인 거래 사이트를 만들었다. 30년이 지나고 이 사이트는 1억3400만명의 사용자와 23억건에 달하는 상품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된 이베이는 2024년 한 해 동안 약 750억달러 규모의 상품 거래를 중개했다. 매출은 103억달러였다. 또한 2002년에는 자사의 온라인 결제 서비스로 활용하기 위해 페이팔(PayPal)을 인수했고 2015년부터 분사를 통해 독립 기업으로 운영 중이다.
이베이의 성공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창업자의 성장 배경에 주목하는 시각이 분명 존재한다.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제니퍼 비에가스’는 2006년 7월 오미디야르 전기를 발간한다. 제목은 ‘피에르 오미디야르: 이베이의 창업자’다. 이 책에서는 그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재능을 강조하고 있다. 오미디야르의 어머니 ‘엘라헤 미르잘랄리 오미디야르’는 로샨 문화유산연구소(Roshan Cultural Heritage Institute)의 창립자로 이 기관은 미국에서 페르시아 문화를 장려하고 보존하는 비영리단체다.
엘라헤는 이란에서 태어나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조지타운대학과 UC버클리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며 경력을 쌓았다. 특히 학문적으로 이란의 신비주의 ‘수피(Sufi)’ 사상가들의 글을 파르시에서 영어·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러한 노력이 2000년 ‘로샨 문화유산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로샨(Roshan)은 파르시로 ‘밝은, 명확한, 깨달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오미디야르의 전기 작가는 그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언어적 재능과 문화적 감수성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시작해 이베이를 창업하는 데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오미디야르는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 언어에 능통했다. 프로그래머는 작업을 명령하기 위해 그에 맞는 컴퓨터 언어로 코드를 작성하며 이는 하드웨어와도 구조적으로 적합해야 한다.
오미디야르가 컴퓨터 언어에 탁월했던 배경에는 언어학자인 ‘어머니의 작업과 학문적 성취가 막대한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게 전기 작가의 주장이다. 오미디야르는 2004년 12월 에스콰이어와 인터뷰하며 이란 출신으로서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인생에서 큰 임팩트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문화를 경험하며 자란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이 있다(There are different ways to look at the world)’는 사실을 자연스레 습득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찍고 있는 점들이 미래로 연결된다”
필자도 주기적으로 국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문득 고개를 들고 책장을 보니 ‘Farsi(Persian)’라고 쓰인 포켓북이 눈에 들어온다. 2013년 이란 근무를 시작할 때 샀던 론리플래닛에서 나온 구문집이다. 10년 전 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파르시 표현을 외우던 순간이 생각난다.
당시만 해도 나중에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파르시의 도움을 받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연설에서 “앞을 바라봐서는 점을 이을 수 없다”며 “지금 찍고 있는 점들이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 연결될 것으로 믿어야 한다”고 조언했나 보다.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