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지니어스 법안’ 상하원 통과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눈앞…글로벌 금융 패러다임 대전환 예고
지니어스 법안은 스테이블코인을 미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정의하고 발행 요건, 담보 기준, 공시 의무 등을 규정한다. 또 자금세탁방지법(AML)과 제재법 준수를 의무화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내 ‘안전한 디지털 자산’으로 편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상화폐 업계는 이 법안 통과를 위해 수년간 로비를 벌였으며, 2024년 대선과 의회 선거에서 암호화폐 친화 후보에게 1억1900만달러를 지원했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 등 법정화폐에 가치를 연동한 가상자산이다. 거래 정산이 수 분 내로 가능하고 수수료가 낮아 암호화폐 거래소뿐 아니라 실생활 결제 수단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유통 중인 스테이블코인이 약 2500억달러에 이르며, 대부분 미국 달러 기반이라고 전했다. 씨티 인스티튜트는 이 시장이 2030년까지 최대 3조7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미국의 이번 법제화는 이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같은 날 하원에서는 두 건의 디지털 자산 관련 법안도 통과됐다. ‘디지털 자산 시장 명확성 법안’은 암호자산의 특성에 따라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또는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를 명확히 구분한다. 또 ‘CBDC 감시 국가 방지법안’은 연방준비제도(Fed)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법안은 상원 심의를 앞두고 있다.
법안 통과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이해충돌 우려도 부각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지니어스 법안은 의원 및 그 가족이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지만 대통령과 그 가족은 해당 조항의 예외다. 트럼프 일가는 가상화폐 기업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을 소유하고 있으며, 지난해 자체 스테이블코인 판매로 5735만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법안 통과 소식이 전해진 후 비트코인은 12만634달러까지 반등했으며, 이더리움은 6개월 만에 3500달러를 회복했다.
특히 리플랩스가 개발한 엑스알피(XRP)는 3.47달러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출시된 RLUSD가 제도권 내에서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결과다.
국제 사회는 미국의 입법 움직임에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스테이블코인의 무분별한 확산이 금융 안정성과 통화 주권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FT는 일부 국가들이 대응책으로 자체 CBDC 개발에 나서고 있으나, 애틀랜틱 카운슬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운영 중인 소매용 CBDC는 전 세계적으로 3건에 불과하며, 2건은 이미 중단됐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는 2021년 도입된 나이지리아의 디지털화폐 ‘이나이라’가 있다. 유엔 디지털자산기구 관계자는 해당 프로젝트가 신뢰를 얻지 못해 민간 스테이블코인으로 수요가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영국과 유럽연합(EU)도 각기 다른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전 영국중앙은행(영란은행) 핀테크 부서장 바룬 폴은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정책이 영국의 규제 완화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영란은행은 디지털 파운드 대신 ‘토큰화 예금’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으며,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 유로 도입을 본격 추진 중이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조쉬 립스키 선임국장은 “디지털 유로의 성공 여부가 공공 디지털화폐 모델의 글로벌 기준을 정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니어스 법안에 서명하면 미국은 디지털 금융 규제의 세계 표준을 선점하게 된다. 향후 글로벌 금융 질서의 방향을 좌우할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