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엔비디아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의 인공지능(AI) 반도체 회사 엔비디아가 미국 주식시장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다. 시가총액 4조달러. 우리 돈 5520조원으로 인도 국내총생산(GDP) 3조9000억달러 달러, 영국 GDP 3조6000억달러, 프랑스 GDP 3조2000억달러보다 크다. 물론 한 나라의 GDP와 주식회사의 시가총액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엔비디아가 달성한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 시총 1위인 삼성전자 13개를 합친 규모를 넘어선다.
엔비디아가 미국 주식시장의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닷컴 시대를 이끌어온 빅테크보다 먼저 시총 4조달러를 넘어선 것은 글로벌 산업·경제의 패러다임이 AI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미국 증시에서 시총 1위 기업의 변화는 그 시대의 산업과 기술 흐름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총 4조달러의 벽을 뚫은 AI혁명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 작가 존 헤이우드가 프랑스 속담에서 차용했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3년 케임브리지대학 연설에서 사용한 이 문구는 대기만성의 힘을 강조하는 유명한 말이다. AI혁명의 총아로 시총 4조달러의 벽을 뚫은 엔비디아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이민 1.5세대인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1993년 공동창업자 2명과 4만달러로 회사를 시작했다. 첫 그래픽처리장치(NV1)을 내놨지만 실패한 데 이어 두 번째 제품 NV2도 실패해 파산직전에 몰렸다. 회사 인력의 절반 이상을 내보냈는데도 남은 직원들에게 월급 주기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NV2는 엔비디아가 일본 게임기업 세가(SEGA)의 차세대 콘솔용 그래픽 사운드칩으로 개발한 제품이었다. 세가 납품용 엔비디아 칩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플랫폼과 호환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시 엔비디아가 처한 상황을 “과업을 끝내고 천천히 죽어가든가, 아니면 계약을 포기하고 곧장 죽든가”라고 표현했다. 파이낸셜 펀딩을 한 실리콘밸리의 금융투자사들은 엔비디아가 망해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젠슨 황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엔지니어 출신 세가 미국 지사장인 이리마지리 쇼이치로에게 곤경을 호소했다. 젠슨 황은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이리마지리를 설득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젠슨 황의 자신감과 열정에 반한 이리마지리는 본사를 설득해 500만달러를 엔비디아에 투자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6개월의 시간과 자금을 확보한 젠슨 황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다이렉트X와 호환할 수 있는 새로운 칩 ‘RIVA 128’ 즉 NV3를 개발해 1997년 발매 후 4개월 만에 100만개 이상을 파는 첫 번째 히트상품을 내놓게 됐고, 그 덕에 기사회생해 1999년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엔비디아는 이 때 이후 비공식 사훈으로 ‘우리 회사는 파산까지 30일 남았다’로 정했다고 한다. 젠슨 황은 훗날 이리마지리를 위해 기꺼이 강연에 나서는 등 은혜를 갚았다. 세가도 투자금으로 확보해놓은 주식을 팔아 큰 수익을 거두었다. 젠슨 황은 삼성전자와도 연이 있다. 엔비디아가 ‘을’이고 삼성전자가 ‘갑’이었던 시절인데 한국 엔비디아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 듯하다. 이제는 ‘갑’과 ‘을’이 바뀐 처지가 됐다.
엔비디아는 2016년 세계 최고의 그래픽카드(GPU)를 만들어내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이때 그래픽 카드로 번 돈을 묵묵히 딥러닝과 AI를 준비하며 이 분야에 쏟아 부었다. 일론 머스크와 오픈AI에 최초의 AI 슈퍼컴퓨터를 전달해준 게 2016년 8월이다. 쌤 올트먼의 오픈AI가 챗GPT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도록 뒤에서 GPU를 공급하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사람이 젠슨 황이다.
‘AI 플랫폼 기업’ 엔비디아 탄생, 언제 망할지 모르는 벤처가 출발점
엔비디아가 가장 먼저 AI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CEO의 도전과 혁신, 작은 변화를 읽고 사업과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민성, 장기적으로 산업 생태계를 구성한 성장 전략 덕분이다. 젠슨 황의 전략은 단순한 ‘기술 선도’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읽고, 기술보다 먼저 사람을 설득하며, 시장의 맥을 읽어내는 경영자적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쳇GPT의 등장과 함께 AI 시대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엔비디아가 AI 산업의 최대 수혜자 위치에 자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PC 플랫폼 기업’ 마이크로소프트, ‘모바일 플랫폼기업’ 애플의 뒤를 잇는 ‘AI 플랫폼 기업’ 엔비디아의 탄생은 언제 망할 지 모르는 벤처 스타트업에서 출발했음을 한국의 벤처들은 잊지말자.
안찬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