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심청이도 유튜브에 빠졌을까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가 21세기를 산다면 유튜브에 빠졌을까? 우물에 빠졌던 장화와 홍련은 또 어떨까? 심청이는 거절하기 힘든 거래를 성사시키며 가족의 생존을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고, 장화와 홍련은 말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가족의 균열을 떠안으며 우물에 빠졌다.
목숨을 희생해 겨우 목소리를 내던 동화의 주인공들이 지금이라면 어떤 유튜브 채널에 빠지고, 어떤 댓글을 달며, 또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궁금해진다.
심청이는 아르바이트 서너개 전전하며, 틈틈이 아버지의 삼시세끼나 병간호에 필요한 영상을 봤을까, 아니면 현실을 잊는 무념무상의 쇼츠에 빠졌을까? 장화 홍련은 눈칫밥 먹고 사느라 스마트폰 볼 기회조차 없이 스러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상상을 해보자. 심청이에게 오빠가 있었다면? 장화와 홍련에게 남동생이 있었다면? ‘‘가족들은 너를 몰라줬지만, 나는 네 말에 귀 기울여줄게’라고 속삭이는 알고리즘에 빠졌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이 쉬운 건 주체적 선택 없이 희생 서사에 갇힌 주인공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캐릭터엔 훨씬 넓은 상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동화에 빠진 또 하나의 인물은 아버지다. 이야기엔 분명 등장하지만 존재감은 희미하다. 심봉사는 딸에게 의존하고, 장화홍련의 아버지는 새 아내와 아들이 딸들에게 가하는 학대를 방관한다. 죽은 어미, 가련한 딸, 그리고 악한 새엄마를 말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늘 누구의 화살도 맞지 않는다.
21세기 알고리즘과 극우화에 빠진 아들들의 이야기에도 우물 가장자리엔 어머니만 서 있다. 아들을 귀하게만 키운다고 비난받거나 극우 유튜브의 늪에서 구해냈다고 순교자처럼 찬양받는다. 화살을 받든 상을 받든 늘 어머니의 몫이다.
‘아버지 참여’의 과학
자녀 삶에 있어 아버지의 적극적 참여는 인지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 많은 연구에서 아버지의 참여가 영유아기의 지능, 문제 해결 능력, 학령기 학업 성취, 대학 진학의 가능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한다. 아버지와의 놀이는 정서 주의력 행동조절기술을 연습하는 기회가 되어 두뇌의 실행 기능(executive functioning)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영향은 어머니의 양육과는 또 다른 독립적 영향을 준다.
디지털 환경에서 필터버블에 갇히거나 극단화되는 건 편향된 정보에서 위안이나 소속감을 얻고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에 더 쉽게 끌리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할수록 다양한 정보를 포기하고 안전한 버블 안에 머무르게 된다. 아버지의 참여는 자녀의 사회적 유능감, 관계 형성, 긍정적 상관관계에 기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몸이 아니라 역할이다. 같이 살지 않는 아버지나 혹은 생물학적 유대감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아이의 발달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남성이 아니어도 말이다. ‘누가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아이와 질적인 관계를 맺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누구든 정서적 안정, 인지적 자극, 사회적 기술 발달을 이끌 수 있다. 현재 가족의 형태는 ‘부+모+자녀’의 틀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버지의 관심보다 ‘행동’, 존재보다 ‘역할’
알고리즘 속은 인당수나 우물 속보다 훨씬 깊고 차갑다. 어머니의 노력, 아버지의 관심만으론 필터버블을 터트릴 수는 없다. ‘소년의 시간’의 아버지 에디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관심만 갖고 규칙만 말하는 참여가 아닌, ‘돌봄’의 무대에 직접 오르는 참여가 필요하다. 함께 놀고 좌절하고 경계를 세우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경계란 감정을 억누르는 통제가 아니라 행동의 지도를 함께 그려가는 일이다. “이건 해도 돼, 하지만 저건 안 돼”를 말해주는 어른이 옆에 있어야 아이는 자신을 조절하고 세상과 어울릴 수 있다. 어머니가 ‘모든 걸’ 떠안지 않아도 되도록 역할을 나누고 책임을 공유하는 환경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건 아버지의 말이 아니라 ‘행동’, 존재가 아니라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