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식물, 뭍에 오르다
수정과는 차게 먹는다. 더위가 한창일 때 한모금 마시면 안성맞춤일 음료수다. 생강과 계피를 달여 식힌 물에 곶감을 넣은 다음 설탕이나 꿀을 가미한 수정과는 필자 기억에 별미였다. 계피의 맵고 알싸한 향미가 곶감을 씹는 단맛과 어우러지는 이런 고급스러운 음료의 주재료는 뭐라고 해야 할까? 설날 제사 마치고 큰아버지가 싸리나무 꼬챙이에서 딱 2개씩 나눠주던 곶감 귀한 시절이라면 마땅히 곶감이라는 답을 했겠지만, 지금은 계피 달인 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계피는 톡 쏘는 단맛이 있지만 매운 뒷맛이 센 편이다. 그렇기에 수정과에는 생강이나 꿀을 더해 계피의 매운맛을 누그러뜨리려 했을 것이다. 혈액순환을 돕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니 감기에 걸렸거나 심하게 추위를 타는 사람이라면 계피를 차로 마셔도 좋을 것이다.
지금 보면 학교 앞에서 사 먹었던 계피는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자라는 녹나무과(Lauraceae) 상록교목의 가지 껍질을 벗겨낸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지역에 따라 여러 종의 나무껍질이 계피로 통용되지만 ‘진짜’로 알려진 것은 스리랑카 실론(Ceylon) 섬이 원산지인 계피다. 일찍이 후추처럼 향신료로 알려진 덕분에 계피에는 포르투갈과 영국 네덜란드의 계속되는 침탈을 받았던 역사적 아픔이 서려 있다.
사는 곳과 살아온 역사가 다르므로 중국과 스리랑카가 원산지인 두 계피의 성분도 약간 다르다. 더 두껍고 갈색이 짙은 중국산 계피에는 독성이 있는 쿠마린(coumarin)의 양이 많다는 게 특징이지만 독특한 향을 내는 계피산 또는 신나믹산(cinnamic acid) 유도체가 두 식물의 주성분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실론 계피는 신나믹산이 훨씬 풍부하다. 아마 그런 이유로 부드럽고 자극성 덜한 실론 계피를 더 귀히 여기는 것 같다.
식물이 휘발성 물질을 만든 이유
후추나 마늘처럼 향신료로 쓰이는 식물에는 적어도 두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하나는 향신료가 섞인 음식에는 세균이나 곰팡이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향이다. 코 안쪽 우표 크기의 후각멍울에 자리한 수백 종류의 수용체 단백질은 공기를 타고 온 냄새 분자를 포착해 뇌에 바깥 정보를 전달한다. ‘단맛이군, 먹어’ 또는 ‘으, 쓰다 당장 뱉어.’
신나믹산이 후각수용체를 자극한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짐작하겠지만 향을 내는 물질은 공기중을 훨훨 날아다닌다. 가볍다는 말이다. 화학자들은 대개 탄소 개수가 15개 이하면 휘발성이 있다고 간주한다. 물파스에 든 멘톨이나 솔향을 내는 피넨은 탄소 10개로 구성된다. 계피의 신나믹산은 탄소가 9개다.
따지고 보면 가볍고 휘발성이 있는 정유 화합물은 효용성을 강조한 인간중심적 용어이다. 식물이 휘발성 물질을 만든 목적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으면 솔잎은 향기 나는 물질을 공기 중으로 날려 송충이 입질로부터 주변 조직이 방어태세를 취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아마 신나믹산도 세균이나 곰팡이를 쫓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신나믹산을 포함하는 페닐프로파노이드 화합물이 무척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푸른 식물이 무성한 지구를 당연히 여기지만 사실 그들도 민물에서 나와 천신만고 끝에 땅에 정착한 조상을 지녔다. 조류의 한 종류인 스트렙토식물은 현재 육상에 사는 양치류와 겉씨, 속씨식물의 공통조상이다. 유전체 분석 결과 놀랍게도 이 식물 조상은 신나믹산을 포함한 페닐프로파노이드 물질을 합성하는 효소 일습을 고스란히 갖췄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나믹산은 향기 물질이기 이전에 육상을 넘보던 조류가 자외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패의 요긴한 재료로 쓰였다. 식물 색소로 알려진 플라보노이드가 자외선을 막는 대표적인 페닐프로파노이드 계열 물질이다.
공기 중으로 증발하는 물을 막기 위한 방어벽을 설계하는 작업도 신나믹산 유도체 여러 벌을 한데모아 해결했다. 나중에 이들 고분자는 다년생 나무가 중력을 거슬러 똑바로 설 수 있는 리그닌(lignin) 화합물로 거듭났다.
식물 터 잡고 난 다음 곤충 물고기도 올라와
그렇게 식물은 땅을 벗어나 대기권까지 장악했다. 높이 수관을 드리운 나무는 태양에서 온 광자를 듬뿍 빨아들인다. 식물이 터를 마련하고 한참 지나서야 눈치를 보던 곤충과 물고기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시카고대학 생물학자 닐 슈빈은 약 3억7500만 년 전에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 화석을 찾아 틱타알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피가루 얹은 카푸치노를 마실 때는 오래 전에 벌어진 생명체 상륙 작전도 한번씩 떠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