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 독일, 유럽 재무장 선봉에

2025-07-29 13:00:28 게재

국방비 3배 늘려 1620억유로 투입 … 전차급 AI로봇부터 첩보 바퀴벌레까지

히틀러의 악몽과 평화주의의 DNA가 교차하는 독일이 이제 유럽 재무장의 기수로 우뚝 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지정학적 대지진이 독일을 잠에서 깨웠고, 베를린은 2029년까지 국방예산을 현재 대비 3배 가까이 끌어올려 연 1620억유로(약 236조원)라는 천문학적 규모로 확대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의 총 국방비 지출은 2025년 950억유로에서 2029년 1620억유로로 70% 이상 급증할 예정이다. GDP 대비 국방비 비중도 2024년 2.1%에서 2029년 3.5%까지 끌어올린다. 6월 24일(현지시간)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독일은 약 4000억유로 규모의 차입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대규모 국방비 증액을 뒷받침할 계획이다.

그동안 독일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상대적으로 왜소한 방위산업 구조에 안주해왔다. 위험 회피와 점진적 개선을 숭상하는 기업문화 또한 파괴적 기술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미국의 안보 지원이 더 이상 철통같지 않은 현실에서 독일은 전략적 대전환을 단행하고 있다.

이달 23일 로이터통신이 독일의 유럽 재무장 주도 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창업자·투자자·정책 결정자 등 20여 명을 취재한 결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정부는 인공지능과 스타트업 기술을 차세대 국방 전략의 핵심 축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때문에 독일 정부는 군 고위층과 스타트업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 기존 관료주의 장벽을 대폭 허물고 있다. 메르츠 내각은 지난 수요일 자금난에 시달리는 스타트업들이 국방조달 입찰에 더 손쉽게 뛰어들 수 있도록 사전지급을 허용하는 조달법 개정안을 승인했다. 개정안에는 입찰 자격을 EU 역내 기업으로 제한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됐다.

기존 라인메탈(Rheinmetall), 헨솔트(Hensoldt) 등 방산 대기업들이 전통적인 시스템 주문 물량에 파묻혀 혁신에 집중할 동기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소규모 신생 기업들이 이제 대형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정부 자문에 참여하고 있다.

자율로봇 개발사 ARX 로보틱스의 창업자 겸 CEO 마르크 비트펠트(Marc Wietfeld)는 최근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과의 면담을 회고하며 “장관이 직접 ‘이제 돈은 문제가 아니다. 예산은 이미 확보돼 있다’고 못 박았다”고 전했다.

이런 변화의 상징적 주역이 바로 유럽 최대 방산 스타트업 헬싱(Helsing)이다. 뮌헨에 본사를 둔 헬싱은 지난달 투자 라운드에서 기업가치가 두 배 이상 급등해 120억달러(약 16조원)를 돌파하며 유럽 방산 생태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헬싱의 공동창업자 군드베르트 셰르프(Gundbert Scherf)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운명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4년 전 팔란티어를 꿈꾸며 전투용 드론과 전장 AI를 개발하는 회사를 창업했을 때만 해도 투자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인 셰르프는 “올해 유럽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보다 방산 기술에 더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다”며 “현재 유럽이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에 필적하는 방위산업 대혁신의 기로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헬싱은 현재 전차형 AI 로봇, 무인 소형 잠수정, 실전 투입 가능한 첩보용 바퀴벌레 등 첨단 기술을 개발 중인 독일 스타트업들의 선봉장이다. 늘어난 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처럼 전쟁 패러다임 자체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기술 개발에 투입될 예정이다.

지난달 투자에는 스포티파이 공동창업자 다니엘 에크(Daniel Ek)가 주도한 벤처회사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가 참여했으며, 에크와 투자 파트너 샤킬 칸(Shakil Khan)은 헬싱 지분 투자를 두 배로 확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액셀(Accel), 플루랄(Plural), 라이트스피드 벤처스, 제너럴 캐털리스트 등 글로벌 투자사들과 스웨덴 방산기업 사브(SAAB)도 동참했다.

헬싱은 성명을 통해 “유럽 방위 기술 혁신의 미래를 가속화하겠다”고 다짐했다. 평화주의 독일의 변신이 유럽 전체의 방위산업 지형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주목된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

이주영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