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생활 속 과학이야기
오늘도 우리 식탁엔 몇백만년 진화 드라마가 펼쳐진다
거대한 가계도 속 진실을 찾아서
생물다양성, 종 수는 물론 생활사도
대왕판다와 고래는 친척 관계일까? 고래와 하마의 관계는? 우리가 그동안 짝꿍처럼 먹어왔던 감자튀김과 토마토케첩이 실제로도 사촌 관계라면?
인간에게 족보가 있듯이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들은 거대한 가계도 속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 연결고리를 따라 움직이다 보면 진화의 역사와 유전적 특성 등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된 다양한 생활사까지 함께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계통발생학적(계통적) 다양성(Phylogenetic Diversity, PD)이다. 계통적 다양성은 생명의 나무(계통발생학)에 기반을 둔 생물다양성 척도다. 계통적 다양성은 나무 모양의 진화 계통도에서 선택된 종들을 모두 연결하는 가지들의 총 길이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가지의 길이가 길수록 더 오랜 진화 시간과 더 많은 유전적 변화를 의미하므로, 서로 멀리 떨어진 친척들을 포함할수록 더 높은 다양성 값을 얻는다.
육지에 사는 대왕판다와 바다가 서식지인 고래는 거대한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만난다. 물론 이들 관계를 단순히 ‘친척’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기는 하다. 약 9000만 년 전 공통 조상에서 갈라진 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진화적 특성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래는 하마와 더 가까운 존재다. 국제학술지 ‘미국과학원회보(PNAS)’의 논문 ‘ SINE/LINE 삽입 분석을 통한 고래우제목 간의 계통발생학적 관계: 하마는 고래의 가장 가까운 현존 친척이다(Phylogenetic relationships among cetartiodactyls based on insertions of short and long interpersed elements: Hippopotamuses are the closest extant relatives of whales)’에 따르면, △털과 피지선의 부족 △수중 발성을 통한 의사소통 등 공통적인 여러 수생 적응 특성들은 공통 조상에서 물려받은 공유파생형질이다. 하마와 고래는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조상은 이미 어느 정도 수생 생활에 적응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관계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모두 계통적 다양성에서 비롯한다.
우리가 식탁에서 자주 마주하는 감자 역시 복잡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다. 최근 국제학술지 ‘셀(Cell)’의 논문 ‘고대 혼종화가 감자 계통의 괴경(덩이줄기) 형성과 종 분화를 가능하게 했다(Ancient hybridization underlies tuberization and radiation of the potato lineage)’에 따르면, 감자 게놈을 3451개 구간으로 나누어 분석했을 때 58%의 구간에서만 감자와 토마토가 가장 가까운 관계로 나타났다. 나머지 42%의 구간에서는 감자가 에투베로숨(Etuberosum) 계열과 더 가까운 관계를 보여, 게놈의 서로 다른 부분이 서로 다른 조상을 가리키는 ‘계통발생학적 갈등’ 현상이 확인됐다. 이는 감자가 단순한 진화가 아닌, 토마토 계열과 에투베로숨 계열 사이의 혼종화를 통해 탄생했다는 DNA 증거다. 감자 게놈의 각 부분이 서로 다른 부모 계열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마치 두 가문의 유전적 특성이 모자이크처럼 결합된 형태를 보여줬다.
감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덩이줄기 형성 능력도 이 두 조상으로부터 각각 물려받은 유전자들의 절묘한 조합으로 탄생한 것이다. 토마토 쪽에서 물려받은 빛 신호 반응 유전자와 에투베로숨 쪽에서 받은 전사인자들이 협력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냈다. 덩이줄기로 영양분을 저장하고 무성생식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고산지대 등 새로운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다른 종들끼리 결합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토마토 계열과 에투베로숨 계열의 염색체수가 동일했고 모두 가지과 식물이라 기본 뼈대는 비슷했다.
우리는 이들 사례에서 서로 다른 종의 혼합이 때로는 진화적 혁신을 만들어내고 생물다양성 변이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물다양성을 평가할 때 단순히 종의 개수가 아니라 각 생명체가 간직한 진화적 역사의 깊이까지 고려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러한 계통발생학적 관점은 우리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도 거대한 진화의 역사를 발견하게 해준다. 평범해 보이는 한 끼 식사 속에도 수억 년에 걸친 생명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감자튀김과 토마토케첩의 만남은 단순한 음식 조합이 아니라, 800만 년 전 헤어진 가족의 재회를 의미한다. 우리가 무심코 함께 먹는 이 조합 속에는 혼종화라는 진화적 실험과 그 결과로 탄생한 혁신적 특성들이 숨어 있다. 오늘도 우리 식탁에는 몇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