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금융시장 위협하는 ‘소액후불결제’

2025-08-06 13:00:02 게재

지난 10년간 급성장세 …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소비자 넘어 기업간 거래로 확대”

멕시코 길거리음식 ‘부리토’를 먹을 때, 인기 음악페스티벌 ‘코첼라’ 티켓을 살 때, 심지어 보톡스 시술을 맞을 때도 무이자 소액할부 서비스를 이용한다? ‘지금 사고 나중에 갚는(Buy Now Pay Later, BNPL)’ 서비스가 서구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5일자 온라인판 기사에서 “지난해 BNPL 방식으로 결제된 금액은 전세계적으로 3420억달러(약 480조원)에 달했다”며 “10년 전만 해도 20억달러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급성장세”라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이같은 구매방식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점심값조차 할부로 나눠 내는 모습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비주의의 극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런 방식이 그림자금융에 가까우며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소비자들을 겨냥한 착취적 모델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조롱이나 우려가 소액후불결제 업계의 성장세를 막지는 못했다. 현재는 JP모간체이스와 페이팔 등 굴지의 금융회사들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반대로 BNPL 기업들은 기존 은행이 하던 일들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특히 기업 간(B2B) 대출 시장은 아직 지배적 사업자가 없는 파편화된 구조라 BNPL 방식이 훨씬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BNPL 대출채권을 묶어 자산운용사들이 사들이는 식의 ‘증권화’ 시장도 새롭게 열리고 있다.

지금은 신기해 보일지 몰라도 판매시점 대출(point-of-sale loan)은 꽤 오래된 개념이다. 1856년 아이작 싱어와 에드워드 클라크는 재봉틀을 할부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뒀다.

오늘날의 BNPL 산업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소비자가 100달러짜리 상품을 구매할 경우 몇차례에 나눠 결제할 수 있다. 스웨덴 ‘클라르나(Klarna)’나 미국 ‘어펌(Affirm)’ 등 BNPL 제공업체는 판매자에게 먼저 대금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약 3달러 정도의 수수료를 받는다.

이 방식은 판매자에게도 유리하다.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소비자는 그렇지 않은 소비자보다 최소 20% 더 많이 지출한다. 때문에 판매자는 매출이 증가하는 효과를 얻는다. 소비자는 보통 6주간 4회에 걸쳐 무이자로 해당 금액을 상환하게 된다.

상품을 먼저 받고 나중에 대금을 지불하는 점에서 신용카드와 유사하지만 개별상품 단위로 할부계약을 맺는다는 점에서 한달 단위로 총액결제하는 신용카드와 구분된다. 게다가 신용카드를 발급받기 어려운 저신용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BNPL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아직도 성장 초입 … Z세대가 이끌어

최근 BNPL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가 자사 고객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5년 이전 출생 고객 중 BNPL을 사용중인 비율은 2% 미만인 반면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 고객의 경우 약 10%가 이를 애용하고 있다. 앞으로 소비의 중심이 점점 더 젊은 세대로 옮겨감에 따라 BNPL 시장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BNPL 서비스를 일찍 도입한 스웨덴에서는 온라인 결제의 20% 이상이 이를 통해 이뤄지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6% 안팎에 그친다. 콜롬비아의 아디(Addi), 싱가포르의 아톰(Atome), 사우디아라비아의 타마라(Tamara)처럼 지역 기반 BNPL 스타트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자상거래 중 BNPL 비중이 1%에 못 미치지만 서서히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네이버페이와 카카오페이, 토스가 최근 금융위원회로부터 소액후불결제업무 겸영 승인을 받았다. 올해 2월 금융플랫폼 ‘핀테크퓨처스’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BNPL 시장은 약 37억달러 규모였다. 올해는 43억달러로, 연 13.8% 성장이 예상된다.

산업이 성장하면서 BNPL과 기존 금융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초기 선두주자였던 클라르나는 2017년부터 유럽에서 공식 은행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다. 이 기업 공동창업자이자 CEO 세바스티안 시미앗코프스키는 “인공지능(AI) 기반 디지털 금융비서로 키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어펌은 2년 전 직불카드를 출시했다. 최근 사용자가 급증해 약 200만명의 카드보유자를 확보했다. 이 카드를 사용하면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전액결제나 할부결제가 가능하다. 전자상거래 중심이던 BNPL 결제 방식을 현실세계로 확장시켰다. 최근 2년 동안 클라르나와 어펌 모두 애플페이와 구글페이에 통합됐다.

기존 금융사들은 반대로 BNPL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페이팔은 2020년부터 BNPL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기존 광범위한 가맹점 네트워크를 활용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총 330억달러(약 46조원) 규모의 BNPL 결제를 처리했다. 연간 성장률은 약 20%에 달한다고 밝혔다.

은행들 역시 소비자가 큰 금액을 결제한 뒤에도 이를 나눠 갚을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클라르나는 최근 JP모간 페이먼츠, 스트라이프(Stripe) 등과 협력하면서 이들의 수백만개 가맹점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스타트업은 기업 간(B2B) 신용거래 시장을 뒤흔들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시장은 공급자가 자사 제품을 구매한 기업에 외상으로 물품을 공급하는 방식인데, 미국기업들만 해도 약 4조9000억달러에 달하는 매입채무를 안고 있다. 이는 미국 전체 신용카드 잔액(1조2000억달러)의 약 4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시장은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운영된다. 공급자들은 고객의 신용도를 수작업으로 평가해야 하고 미수금 회수 역시 직접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혁신의 여지가 매우 큰 분야로 꼽힌다.

기업 간 BNPL 대출전문 스타트업 ‘빌리(Billie)’의 공동창업자 마티아스 크네흐트는 “이 분야는 소비자 대상 시장보다 약 15년 뒤처져 있다”고 추산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호코도(Hokodo)’의 공동창업자 리처드 손튼은 “소비자보다 B2B 시장 영향력이 훨씬 클 것”이라며 “젊은 기업들이 BNPL을 이용하면 구매금액이 평균 40% 증가한다”고 말한다.

BNPL 대출채권, ‘핫한 투자처’

BNPL 업체들은 자산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며 빠르게 대출을 확장하고 있다. BNPL 대출채권 시장은 현재 뜨거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 상환기간이 짧고 자산구조가 단순해 기관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거대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계열사 ‘엘리엇 어드바이저스’는 지난해 10월 클라르나의 390억달러 규모 영국 대출포트폴리오를 인수했다. 사모펀드 거물 KKR도 2023년 페이팔의 BNPL 대출 440억달러어치를 사들였다. 어펌은 지금까지 120억달러어치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했다. 한 BNPL 기업 관계자는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전했다.

BNPL 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침체 없이 성장했다. 하지만 진짜 시험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특히 BNPL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은 우려를 낳는다. 실제 클라르나의 올 1분기 소비자대출 손실은 전년 동기 대비 17% 증가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에 따르면 BNPL 이용자 중 연체 경험이 있는 비율은 2021년 15%에서 지난해 24%로 늘었다.

하지만 BNPL 부도율(default rate)은 다른 소비자대출보다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미국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은 2019~2022년 BNPL 대출 부도율이 평균 2%였다고 보고했다. 이는 같은 신용등급의 신용카드 부도율 10%보다 낮은 수치다.

BNPL이 은행이나 정부의 감시에서 벗어난 곳에서 과잉부채를 쌓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여러 업체에서 동시에 대출을 받는 ‘대출중복(stack)’은 채무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CFPB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BNPL을 이용한 후에도 신용카드 채무나 연체가 늘어난다는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BNPL을 쓴 이후 18개월 동안 다른 대출을 추가로 받는 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6월 미국 신용평가사 ‘페어 아이작(FICO)’은 BNPL 데이터를 반영한 새로운 신용점수를 발표했다. 어펌과의 공동연구 결과 BNPL을 자주 쓰는 이들의 신용점수는 오히려 향상되거나 변화가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이었다. 독일 괴테대의 크리스틴 라우덴바흐 박사 팀이 100만건의 대출신청을 분석한 결과, BNPL 사용 이력이 있고 상환실적이 좋은 사람은 신용등급이 같더라도 평균 이자율이 1.4%p 더 낮은 조건으로 대출 받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BNPL이 진짜 시험대에 오르는 날은 경제가 본격적인 침체를 맞이할 때”라며 “지금까지만 보면 BNPL 사용자들은 대체로 젊고 금융이력이 짧은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예상보다 훨씬 건전한 금융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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