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반도체에 100% 관세 예고
한국 반도체 산업 ‘직격탄’ 우려 … 미국 내 생산은 면제 방침
백악관에서 열린 애플의 1000억달러 투자 발표 행사에서 그는 “반도체와 칩에 매우 높은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며 “미국 내에 생산 기반이 있거나 이를 확실히 약속한 기업에는 관세를 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생산이 시작되지 않았더라도 공장 건설 단계라면 면제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는 미국 내 제조를 장려하고 해외 생산을 억제하려는 정책 기조로 풀이된다.
이 같은 조치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도체는 한국의 대미 수출 품목 중 자동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반도체 수출액은 약 106억달러(약 14조7000억원)였다. 현재 한국은 중국, 홍콩, 대만 등지를 경유해 미국으로 반도체를 수출하는 구조도 많아 관세 영향이 간접적으로 더 확산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구체적인 시행 시기를 밝히지 않았지만 앞서 CNBC 인터뷰에서 “다음 주쯤”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를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상에는 반도체 칩이 포함된 모든 제품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한국과 중국에서 생산되는 메모리 반도체가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 중이며 테일러시에는 제2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 공장들은 자율주행용 칩, 인공지능(AI)용 반도체 등 첨단 제품 생산이 목표다. 이들 제품은 미국 내 생산이기 때문에 관세 면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삼성과 SK하이닉스가 한국과 중국에서 생산하는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는 고율 관세 적용이 우려된다.
SK하이닉스는 한국 이천·청주 공장과 중국 우시·다롄 공장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 중이다. 이들 제품이 미국으로 수출되거나 미국 기업에 납품될 경우 100% 관세가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업계는 미국 내 생산 확대를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공장 설립에는 수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만큼, 단기간 대응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같은 날 애플은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위해 1000억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발표했다. 이는 기존 5000억달러 계획에 더해진 것으로 향후 4년간 총 60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애플은 이번 제조 프로그램에 코닝(Corning),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등과 협력할 예정이다.
한국 정부는 앞서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해 최혜국대우(Most-Favored-Nation, MFN)를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이 유럽연합(EU)과 합의한 15% 수준의 품목별 관세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합의를 유지한다는 전제 아래 가능하다. 실제로 100% 관세가 적용될 경우 한국 반도체 산업의 가격 경쟁력은 크게 위협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유사한 보호무역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반도체 생산을 미국으로 유도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이번 조치는 무역 정책 전반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트럼프는 이날 중국과 인도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에 대해서도 추가 관세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외 강경 기조를 드러냈다.
현재 대만의 TSMC, 미국의 인텔, 글로벌파운드리스, 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업들도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약속하고 있다. 다만 실제로 약속된 투자나 일자리가 모두 실현될지는 불확실하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들 투자 중 상당수가 이미 예정돼 있던 계획이거나 대선 전략 차원에서 발표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