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실용적 시장주의’와 대처의 그림자
21세기에 친위쿠데타라는 황당한 사건을 겪은 뒤 출범한 정부인만큼 국민의 기대와 희망은 크다. 이재명정부는 두달 전 출범하면서 통합과 실용적 시장주의를 새 정권의 모토로 내세웠다. 국민통합은 모든 정권이나 정부의 궁극적 목표라는 점에서 무리가 없었지만 실용적 시장주의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마켓을 정치의 깃발로 삼은 민주주의 선진국 사례는 보지 못했다. 기본으로 시장경제는 자유주의 우파의 전통적인 가치관이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 가격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경제가 말끔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과 효율을 동시에 추구하는 완벽한 시장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런 시장은 경제에나 적합하지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유럽 좌파가 효율적인 ‘시장경제’는 뒤늦게 받아들였으나 그렇다고 ‘시장사회’가 돼서는 곤란하다고 명백하게 밝힌 이유다.
시장만 앞세운 게 아니라 급기야 시장에 ‘주의’까지 붙였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영어의 ‘~ism’에 해당하는 ‘주의’는 일반적으로 어떤 체계적 사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유기적으로 구성된 사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귀차니즘’이나 ‘무기력주의’처럼 장난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정말로 이런 가벼운 구호가 새 정부의 비전이라면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국제사회에서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거의 독보적으로 시장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기괴한 정치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국가를 약탈자들의 집단으로 보고 규제철폐, 공공부문 축소와 민영화, 심지어 중앙은행 폐지를 주장한다. 물론 밀레이도 스스로는 자유주의자라고 하지 시장주의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시장 근본주의자(market fundamentalist)로 부를 뿐이다.
주가지수를 정책목표로 삼는 무모함
시장주의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정책 목표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코스피5000’을 정부의 목표로 삼는다는 황당한 구호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정상적인 정당이나 정부가 주가를 정책목표로 삼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시장과 경제에 대해 기초만 아는 사람도 주가와 경제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건 체중이나 시력만 갖고 신체의 건강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려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다. 게다가 주가는 단기적으로 등락을 거듭하고 매우 변동성이 강하다. 혈압과 비슷하게 하루에도 높낮이의 널뛰기가 보편적이다.
무엇보다 주식시장의 ‘개미’는 숫자가 많아 보여도 국민의 일부이고 소수일 뿐이다. 주식시장의 상태를 국가 목표로 삼는 사고방식은 국민 전체가 아닌 특정 소수를 위한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선언이다. 주식과 비트코인 거래로 구설에 오른 민주당 정치인들을 보면 코스피5000은 국민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정책이 아닌가 의심도 든다.
한국에서 좌파정부가 주가상승을 목표로 시장주의를 실천한다는 이례적 사실은 세계 정치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재명정부가 간판으로 내세우는 실용적 시장주의는 실제 1980년대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 수상이 추진한 ‘대중적 자본주의’와 매우 유사하다. 자본가만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다양하게 자본주의의 혜택을 골고루 나눠주겠다는 목표를 추구했다. 그래서 공공주택을 거주자가 구매할 수 있도록 분양했고, 국민의 다수가 주식을 보유할 수 있도록 주식시장의 제도를 뜯어고쳤다.
1986년 런던 시장의 탈규제 ‘빅뱅’은 영국 주가지수를 1984년 1000에서 1987년 2400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해 10월 소위 블랙먼데이에는 하루에 10% 이상이 빠지는 충격을 경험하기도 했다. 2000 아래로 하락한 지수는 몇년 후인 1990년이 돼서야 다시 2000을 회복했다.
‘실용적 시장주의’ 이데올로기 좌표는 어디?
이미 지적했듯 주식지수는 변동이 심하고 해외 사정이나 투자자의 심리를 포함한 다양한 변수를 반영하기에 정부의 정책 목표가 되기에는 너무 위험한 표적이다.
대처는 민주당이 그동안 비난해온 신자유주의의 어머니다. 실제 대처의 대중적 자본주의는 시민이 집이나 주식을 가진 소유자가 될 때 책임 있는 시민이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이재명정부와 민주당은 모호한 ‘실용적 시장주의’라는 구호는 내려놓고 아예 대처의 신자유주의 유산을 받아들여 ‘대중적 자본주의’를 지향한다고 고백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