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오징어 변신의 비밀 속 사인함수
언젠가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아프리카의 푸른 과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있었다. 마블 베리(marble berry)라는 별명의 과일이 내뿜던 금속성 짙푸른 색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색상 중 하나다. 흔히 접하는 꽃이나 과일은 보통 특정 색을 흡수하는 색소로 고유한 색을 발현한다. 가령 바나나는 카로티노이드 계열 분자들이 햇빛 중 청색영역을 흡수해서 노란색을 띤다. 그런데 마블 베리가 내는 색의 원리는 전혀 다르다. 과일 외피에 층층이 쌓인 미세구조가 파란빛만 집중적으로 반사해 만드는 구조색(structural color)이기 때문이다.
구조색은 식물보다 동물계에서 더 흔하다. 모르포나비의 푸른 날개, 공작의 화려한 무지갯빛 깃털, 딱정벌레를 포함한 다양한 곤충들의 현란한 등껍질 색상은 모두 색소 대신 특정한 미세구조가 빛에 반응해 만들어진다. 판상의 구조가 쌓여 있거나 작은 구슬들이 주기적으로 배치된 미세구조는 입사하는 태양빛을 반사하거나 산란시키며 일정한 방향으로 특정 색상의 빛을 강하게 형성한다. 어떤 색상의 빛이 강하게 반사되는지는 나노구조의 배치 간격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구조색의 주인공들은 지상에만 있지 않다. 바닷속 동물 중에도 짙은 청색이나 화려한 무지갯빛을 뽐내는 생물들이 많다. 이중 변신의 귀재는 온갖 색상을 보이다가 갑자기 투명해지는 일부 오징어일 것이다. 최근 미국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은 북대서양 연안에 사는 한 오징어의 탁월한 변신 뒤에 숨은 비밀을 밝히고 있다.
굴절률 변하는 패턴따라 색깔도 변화
오징어의 표피에 들어 있는 반사색소포(iridophore)에는 판형의 단백질 수십개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열되어 기둥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판형 단백질은 주변조직에 비해 굴절률이 높다. 흡사 공기 중에 수십 장의 유리창이 주기적으로 배치된 상황과 비슷하다.
유리와 공기처럼 굴절률이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나면 그 경계에 입사하는 빛의 일부는 반사된다. 유리창 앞에 서 있으면 내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 다른 예로 비누방울이 있다. 비누방울이 공중에 떠 있을 때 이 얇은 막은 외부 및 내부 공기와의 사이에서 두 경계면을 만든다. 비누방울에 입사하는 빛의 일부는 두 경계에서 연이어 반사된다.
빛은 파동인 만큼 두 경계에서 반사된 두 빛은 서로 중첩되며 간섭을 일으켜 우리 눈에 들어온다. 파도의 마루와 마루가 만나면 더 높은 파도가 생기듯이 비누방울 막의 내외부 경계에서 반사된 두 빛은 특정 색상의 빛에서 강해지며 반사된다. 어떤 색의 빛이 강하게 반사되는지는 막의 두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중력으로 처지며 두께가 달라지는 비누방울은 화려한 무지개빛을 뽐낸다.
오징어의 반사색소포 속에서 생기는 일도 동일하다. 수백 나노미터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배치된 판형 단백질의 각 경계에선 굴절률의 차이로 인해 빛들이 조금씩 반사된다. 이처럼 다중반사된 빛들 중 특정 색상의 빛은 흡사 파도의 마루와 마루가 만나듯이 중첩되면서 강하게 반사된다. 주기가 달라지면 반사되는 빛의 색도 변한다.
오징어가 외부에서 갑자기 자극을 받아 몸을 수축하거나 늘리면 판상 구조물 사이의 간격도 달라지며 반사된 빛의 색상이 변한다. 연구자들이 논문 사이트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오징어의 피부가 녹색에서 주황색 빨간색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게다가 판상 구조물의 간격으로 결정되는 반사색의 파장 대역이 가시광선을 벗어나면서 오징어의 피부는 투명하게 변했다.
색소포 속 굴절률의 3차원 분포를 조사한 연구팀이 밝힌 오징어 변신의 비밀은 바로 굴절률이 변하는 패턴에 있었다. 가령 공기와 유리의 경계에선 굴절률이 1에서 1.5로 갑자기 불연속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오징어 색소포 속 판형 단백질들의 주기적 배열이 만드는 굴절률의 분포는 수학에서 배운 사인(sine)함수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이 경우 굴절률이 갑자기 변하는 패턴에 비해 훨씬 투명한 상태가 구현될 수 있었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진화하면서 다채로운 색상과 투명한 상태를 넘나드는 오징어 피부 속에는 사인함수의 비밀이 숨어 있던 셈이다.
신소재에 색상변화와 투명성까지 재현
구조색은 보통 색소로 구현된 색상보다 훨씬 생생하고 각도나 주기에 의해 색상이 조절되며 색이 바래지 않고 오래 간다는 특징으로 인해 과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아왔다.
오징어의 비밀을 밝힌 연구팀은 신축성 있는 소재에 오징어의 반사색소포와 비슷한 나노구조체를 넣은 복합물질을 개발한 후, 연신 과정을 통해 다양한 색상변화와 투명성까지 재현할 수 있었다. 수십억년 진화의 비밀이 숨어 있는 생명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