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젠슨 황도 쩔쩔매는 ‘슈퍼을’ 기업들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의 최전선에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서 있다. 그러나 황 CEO조차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공급망 곳곳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만과 일본의 이른바 ‘슈퍼을(乙)’ 기업들이다.
대만 ‘컴퓨텍스 2025’ 개막을 앞둔 지난 5월 17일 저녁, 대만의 한 식당에 젠슨 황 CEO와 함께 TSMC의 웨이저자 회장, 콴타컴퓨터의 배리 램 회장 등 글로벌 반도체·서버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였다. 포토타임에 젠슨 황의 오른쪽에는 TSMC의 웨이저자 회장이, 왼쪽에는 배리 람 회장이 앉았다. 현지 언론은 이 모임을 ‘조달러 연회’라고 불렀다. 참석한 30여명 대만 반도체 등 관련 기업인의 시가총액만 1조달러를 웃돌았기 때문이다. 배리 람 회장은 재산이 20조원대로 웨이저자 회장보다 많은 대만 최고 부자다. 콴타는 엔비디아의 AI칩으로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등의 데이터센터 서버를 구축해주는데 “콴타가 없으면 세계 AI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AI 소프트웨어는 미국 빅테크, AI 하드웨어는 대만 카르텔이 주도
이날 모임에는 ‘젠슨 황의 숨겨진 VIP’로 불리는 세계 3위의 후공정 패키징(OSAT) 업체 스필(SPIL)의 차이치원(蔡祺文) 회장도 자리했다. 이 회사의 기술력을 높이 산 젠슨 황 CEO는 TSMC를 압박해 첨단 AI칩 패키징 기술인 ‘칩온 웨이퍼 온 서브스트레이트’(CoWoS) 중 ‘oS’에 해당하는 공정을 스필에 맡기라고 재촉했고 물량의 60%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필의 신공장 준공식에 젠슨 황 CEO는 대만 타이중 국제공항에 전용기를 띄워 참석했을 정도다. 대만의 AI칩 패키징과 테스트 분야는 독보적이다. 2016년 세계 1위 패키징 업체인 대만 르웨광(ASE)과 스필이 합병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패키징 강자가 탄생했는데 스필은 독립적인 운영을 보장받고 있다. 당시 2위였던 한국계 미국 반도체 OSAT 업체 앰코마저도 그 영향력 앞에 크게 위축됐다.
대만은 단순한 생산기지를 넘어 글로벌 AI 하드웨어 공급망의 심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AI 소프트웨어 패권은 미국 빅테크가 쥐고 있지만 하드웨어의 핵심은 ‘대만 카르텔’이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만 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파운드리 분야의 절대 강자인 TSMC를 중심으로 콴타 르웨광 폭스콘 위스트론 같은 기업들이 긴밀하게 산업 기술 생태계를 함께 구축했다. 엔비디아와 같은 글로벌 칩 설계 회사는 결국 이들 대만 기업의 협조 없이는 사업을 확장할 수 없다.
AI 반도체 시대의 또 다른 슈퍼을은 일본의 소재 기업들이다. 첨단 기판에 쓰이는 특수 소재 분야에서 일본 기업들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닛토보(Nittobo. 닛토방적)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고성능 유리섬유 ‘티글라스(T-glass)’는 고열과 고주파를 견디며 열팽창계수가 낮아 AI 서버용 기판에 필수적이다. 대체제가 없다는 점에서 닛토보는 글로벌 IT 기업과 반도체 제조사들에게는 ‘목줄’을 쥔 존재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은 이미 2027년까지 물량을 선계약하며 사실상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다. 닛토보는 엔비디아의 증설 재촉에도 “2027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만큼 수요가 공급을 압도한다는 뜻이다.
동박 분야의 미쓰이금속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반도체 패키지용 초박형 동박 시장에서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한다. 두께 1.5마이크로미터(㎛)의 초정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미쓰이금속뿐이다.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액정 TV 등 고성능 기기의 회로판에 사용되는 이 동박은 이제 고성능 AI 반도체 기판에도 필수다. 닛토보와 미쓰이 금속은 'AI산업 전망의 기상관측소'라는 별칭이 붙을 만하다.
AI산업 전망의 기상관측소 닛토보
이처럼 대만과 일본의 기업들은 엔비디아조차 쩔쩔매게 만드는 존재다. 겉으로는 엔비디아가 AI 혁명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공급망의 특정고리를 쥐고 흔드는 슈퍼을이 있다. 공급망의 한 축만 흔들려도 글로벌 AI 산업 전체가 휘청일 수 있다. AI 시대의 경쟁은 단순히 엔비디아와 AMD,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 간의 칩·서비스 경쟁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슈퍼을’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얼마나 협상력을 발휘하느냐가 산업 판도를 결정한다. 대만이 AI 하드웨어 허브로 떠오른 것도, 일본 소재 기업들이 글로벌 IT 기업으로부터 선계약 러브콜을 받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젠슨 황이 전용기를 타고 와 만나는 반도체 관련 기업은 아직 없는 듯하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대만과 일본 기업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유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안찬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