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글로벌 식량 공급망 재편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
21세기 세계 식량 공급망은 거대한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인류의 식량 시스템은 오랫동안 바다를 무대로 공고히 작동해왔다. 브라질의 콩과 미국의 옥수수는 초대형 선박에 실려 대양을 건너 유럽과 아시아로 향했고, 곡물무역의 90% 이상이 해상운송에 의존했다. 파나마운하와 수에즈운하는 세계 식량 안보를 떠받치는 핵심 관문이었다. 그러나 기후변화와 지정학적 불안이 겹치면서, 이 ‘해양시대’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
기후변화는 북극의 빙하를 녹이고 있다. 인류에게는 재앙이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막혀있던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러시아 북부를 따라 이어지는 북극항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거리를 30~40% 줄여준다.
러시아는 흑해의 불안정성을 상쇄할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통한 곡물수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아직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2035년까지 물동량을 2억톤으로 늘리겠다는 국가적 목표를 세우고 쇄빙선단과 항만 인프라 확충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도 ‘빙상 실크로드’ 전략을 내세우며 북극항로를 식량안보의 핵심 동맥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말라카해협이나 수에즈운하 같은 기존 해상루트의 지정학적 위험을 회피하려는 수준을 넘어선다. 새로운 곡물 공급처와 소비시장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하고, 동시에 해상 패권질서에 대한 구조적 대안을 마련하려는 공세적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러시아 북서부의 무르만스크나 아르항겔스크 항구에서 선적된 밀 보리 유채씨 등은 북극항로를 통해 중국 동부의 칭다오나 상하이 같은 주요 항구로 직송될 수 있다. 이는 흑해와 수에즈운하를 거치는 기존 경로보다 운송 거리를 획기적으로 단축시킨다. 이미 러시아는 곡물과 냉동 대구 등 수산물의 대중국 수출을 북극항로로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양국은 북극항로 개발 협력을 공식화한 상태다.
유라시아 농업지대와 새로운 협력 구도
결국 중국의 ‘빙상 실크로드’는 러시아와 유라시아 대륙의 농업 잠재력을 자국 식량안보와 연결하는 ‘대륙-해양 연계 공급망’의 출발점이다. 이는 식량안보와 산업·물류전략을 결합해 전통적인 해상 패권질서를 넘어서는 독자적 경제 동맥을 구축하려는 거대한 구상의 시작이다.
해양 공급망이 흔들릴수록 대륙의 농업지대가 주목받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곡창지대는 이미 세계 식량시장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취약한 물류망은 생산성과 수출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 부족한 철도와 항만 인프라는 늘 구조적 병목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최근 변화의 흐름은 뚜렷하다. 카자흐스탄산 곡물은 알라샨코우(阿拉山口)와 호르고스(霍尔果斯) 국경을 거쳐 중국 신장으로 대량 수송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맞물려 물동량 급증을 이끌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 대중국 곡물수출(밀 보리 아마씨 등)은 수십~수백배 늘었고, 중국은 카자흐스탄 밀의 최대 수입국으로 부상했다.
양국은 국경지역에 대규모 물류터미널을 세우고 철도망을 확충하며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철도루트는 카자흐스탄산 곡물을 중국 서부에 직접 공급한 뒤, 다시 동부 항만을 거쳐 베트남 등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식량 루트’로 발전하고 있다.
러시아도 극동을 거점으로 아시아와의 협력을 넓혀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과 하산-라진 프로젝트는 단순한 자원협력을 넘어 곡물 축산 수산물까지 아우르는 북방 협력모델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 지역은 일본 한국 중국이 모두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전략적 접점이기도 하다.
한국의 선택, 해양 의존에서 대륙 연계로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20%에 불과해 필요한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한다. 문제는 이 공급망이 몇 개의 좁은 관문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파나마의 가뭄으로 운하가 막히거나 홍해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그 충격은 곧바로 국내 식량불안으로 이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륙 연계 전략’이다. 러시아 극동과 중앙아시아 농업지대와 협력해 단순 수입을 넘어 공동 투자와 물류 인프라를 구축해야 안정적인 전략 루트를 확보할 수 있다. 동시에 북극항로를 적극 활용해 식량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한다. 한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물류 역량을 식량수입과 결합한다면 해상위기에 대응하는 보완책이자, 동아시아의 식량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기후변화와 지정학적 위기가 흔드는 식량 공급망은 한국에 위기이자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