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여행 금지 조치, 미국의 아시아 입지 약화
미얀마 난민 외면한 결정
미국 전략적 리더십 균열
지난 6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복귀 이후 첫 주요 조치로 12개국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여행 금지 정책을 단행했다. 이 조치는 이란, 예멘 등 기존 대상국뿐 아니라 미얀마까지 포함했고, 미국의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을 사실상 중단시켰다. 과거 무슬림 금지 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이 조치는 단순한 안보 대책을 넘어,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외교적 신뢰와 도덕적 리더십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르하르트 호프슈테터 퀸즐랜드 대학 교수는 20일자 East Asia Forum 기고문에서 이 조치가 “소프트파워의 기반을 흔들며, 미국의 전략적 실패를 드러내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미얀마 사례에 주목했다. 미얀마는 수십 년간의 내전과 군부 폭정으로 인해 300만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으며, 그중 상당수가 방글라데시 태국 말레이시아 등지에 머물고 있다.
미국은 2007년 이후 16만명 이상의 미얀마 난민을 재정착시켰고, 이들은 전체 미국 난민 입국자의 약 25%를 차지했다. 특히 친(Chin) 공동체는 미국 내 교회 네트워크를 통해 성공적으로 정착해 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미얀마를 여행 금지 국가로 지정하면서 관광 비자 초과 체류율(27%)과 추방 협력 부족을 근거로 들었다. 이는 실질적인 국가 기능이 마비된 미얀마 현실을 무시한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사전 승인 난민들의 발이 묶였고, 동남아시아 각지의 인도주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태국 국경 캠프에는 약 8만명의 난민이 수십 년째 거주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에는 미얀마 출신으로 추정되는 난민 약 20만명이 머물고 있다.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지역에는 100만명이 넘는 로힝야 난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 최대 규모 난민 캠프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2024년까지 방글라데시에 연간 3억1000만달러를 지원하며 전체 국제 원조의 55% 이상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정책 변화로 원조가 대폭 삭감되면서 식량 배급은 절반으로 줄었고 의료 시설은 폐쇄됐다.
방글라데시는 현재 정치적 전환기 속에서 세계은행으로부터 4억700만달러를 대출받아 난민 지원을 이어가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이 줄어들 경우 강제 송환 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호프슈테터 교수는 미국의 후퇴가 인도주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지역 국가들에게 미국의 약속이 조건적이고 일관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준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세안(ASEAN) 국가들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난민 부담 분담 메커니즘과 지역 보호 체계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더구나 미국의 이번 조치는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 외교적 공간을 열어주는 효과도 낳고 있다는 것이 호프슈테터 교수의 진단이다. 특히 미국이 미얀마 국적자를 남수단으로 추방하려 한 사례는 국제법과 자국 법원의 명령조차 무시한 처사로 미국의 법적·도덕적 신뢰성에 타격을 줬다고 평가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