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은행, 스테이블코인 이자지급 차단 로비중
예금 9100조원 이탈 우려 월가-가상화폐 업계 충돌
미국 은행권이 새로 제정된 스테이블코인 규정을 바꾸기 위해 로비에 나섰다. 고객 예금이 수조달러 규모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이는 전통 월가와 급성장 중인 가상화폐 산업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은행협회(ABA), 은행정책연구소(BPI), 소비자은행협회(CBA) 등 주요 은행 로비 단체들은 최근 의회에 보낸 서한에서 새 규제에 ‘허점(loophole)’이 있어 일부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사실상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게 이자를 지급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등 실물 자산에 연동된 디지털 토큰이다. 지난 7월 의회를 통과한 ‘지니어스법(Genius Act)’은 2880억달러(약 400조원) 규모의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규제하는 법으로, 발행사가 고객에게 이자나 수익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자체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는 있지만, 예금자에게 이자를 줄 수는 없다.
반면 써클, 테더 등 제3자가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보관하는 가상화폐 거래소는 보유자에게 간접적으로 이자나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 은행권은 이로 인해 경쟁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고객이 은행 예금 대신 거래소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수익을 추구하게 되면 대규모 예금 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 재무부가 지난 4월 내놓은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이자를 제공할 경우 은행권에서 최대 6조6000억달러(약 9174조원)의 예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은행 단체들은 이 같은 대규모 자금 유출 위험이 특히 금융 불안기에 심각해질 수 있으며, 경제 전반의 신용 창출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금리 상승, 대출 축소, 가계와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씨티그룹 산하 ‘미래금융 싱크탱크’의 로닛 고세 소장은 이 같은 예금 유출 가능성을 1980년대 머니마켓펀드의 급성장에 비유했다. 당시 보통 예금계좌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한 머니마켓펀드로 자금이 이동하면서 은행권은 큰 압박을 받았다.
컨설팅사 PwC의 션 피어구츠 은행·자본시장 담당은 “고수익 스테이블코인으로 소비자가 이동하면 은행들은 더 비싼 도매자금 시장에 의존하거나 예금 금리를 높여야 한다”며 “그 결과 가계와 기업의 신용 비용이 더 비싸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가상화폐 업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암호화폐 혁신위원회와 블록체인협회는 상원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은행권이 “산업 전반의 성장과 경쟁, 소비자 선택을 희생시키면서 은행 보호를 위한 반(反)경쟁적 환경을 조성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은행들의 요구가 “특히 대형 은행 같은 기존 기관에 유리하게 판을 기울게 하고,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선택권을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코인베이스의 폴 그레왈 최고법률책임자도 소셜미디어 X에 올린 글에서 “이건 허점이 아니다. 다수의 의원들이 경쟁 회피라는 당신들의 과도한 요구를 거부했다”며 “백악관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라고 말했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