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가짜뉴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준비된 외교
K-외교라 할 만하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가장 큰 위기는 회담 시작 직전이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숙청이나 혁명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히 가짜뉴스였다. 특정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든 단순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든,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는 이런 행위는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 국익보다 정쟁을 앞세운 태도는 결국 대한민국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이런 돌발적 상황은 오히려 우리 대표단의 준비성과 대응력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의 협상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까지 숙독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강훈식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진이 총출동해 사실상 총력전을 펼쳤다. 회담 전까지 수차례 모의 협상을 거치며 트럼프 특유의 돌발 화법과 압박 전술에 대비했다고 한다. 의전 절차를 넘어 상대의 언어와 심리를 파악해 맞춤형 대응한 것이다.
트럼프 공세 무력화한 전략적 대응
트럼프는 본래 기습적 질문과 공세적 태도로 상대의 허점을 노리지만 이번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트럼프가 스스로 ‘피스메이커’로 기억되길 원한다는 점을 간파한 이재명 대통령은 “당신이 피스메이커라면 나는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트럼프는 이에 호응하며 김정은 위원장과의 대화 의향을 강하게 밝혔다. 단순히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끌어내는 성과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오랜 숙원이었던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테이블에 오른 점도 중요한 성과다. 원자력협정이 개정되면 한국의 핵주기가 완성되고 전력 수급뿐 아니라 국제적 위상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중장기적으로 국가 에너지 전략과 안보를 좌우할 사안이 정상 간 합의 의제로 논의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비서실장 간 핫라인 구축 합의이다. 양국의 비서실장이 직접 연결되는 직통 채널은 돌발 상황 발생 시 양 정상의 의사가 왜곡이나 지연 없이 즉각 소통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이는 정상 간 대화의 보완책이자 향후 한미 간 협상 동력을 유지하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그동안 외교 현장에서 크고 작은 오해로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한 전례를 생각한다면 이 핫라인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점은 이번 회담에서 우려했던 방위비 분담금 증액 논의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논의의 중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회담 전부터 우리가 가장 예민하게 여겼던 문제들이다.
우리 측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의제 설정 전략이 주효했음을 보여준다. 만약 이 사안들이 테이블에 올랐다면 회담의 흐름이 훨씬 불리하게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실질적 협력 의제로 회담을 집중시킨 것이 주효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정상회담은 원래부터 기대치가 높지 않았다. 트럼프의 돌발적 언행과 회담 직전의 가짜뉴스 파동까지 고려하면 “트럼프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해도 성공”이라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그것을 뛰어넘었다.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회담이었다.
물론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조선 협력, 대북 대화 모멘텀, 비서실장 핫라인 모두 구체적 실행과 제도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쉽게 휘발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과 대표단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적 지지,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 경제계의 실행력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정치적 계산 때문에 외교 성과를 깎아내리거나 국익을 소모하는 일은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된다.
실질 성과 거둔 의제 설정의 승리
워싱턴에서의 이번 회담은 준비된 외교가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무엇보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주한미군 문제를 의제에서 배제했다는 점에서 이번 회담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성과를 공고히 하고 실질적 결실로 만드는 일이다. 외교적 성과는 단 한 번의 회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준비된 지도자와 단합된 국민, 그리고 국익 중심 외교가 함께 만들어가는 종합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