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전문 멘토단과 유학생 기자단이 전하는 APEC 백스테이지
경주에서 만난 신라의 길, 세계를 여는 외교 무대
백스테이지에서 넥스트 스테이지로 힘찬 발걸음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몽골 제국의 명장 톤유쿠크가 남긴 이 문장은 2025년 여름 경주에서 진행한 특별한 외교 실험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
8월 25일 오전 11시 경주역 플랫폼 앞에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러시아, 베트남, 일본, 방글라데시, 대만, 체코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도시에서 특별한 여정을 시작하는 약간은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긴장감은 사라지고 두 눈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여행이나 문화 체험이 아니었다. 오는 10월 말 열리게 될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기획된 민간이 주도하는 공공외교 프로젝트 ‘APEC 백스테이지’ 참가자들이다. 이들은 콘텐츠를 통한 실전 외교를 직접 수행하는 ‘외교 연습생’이었다.
사단법인 ‘밥일꿈’이 주최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한 이번 프로그램은 체험과 글쓰기를 결합해 APEC과 한국, 그리고 자국 간의 연결고리를 각자의 언어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실전형 외교 플랫폼이었다. 외교는 회담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로도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백스테이지’라는 이름에 오롯이 담겼다.
3개월 전부터 시작된 외교 훈련
이틀간 진행된 이번 프로젝트는 비단 경주 현장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6월부터 시작된 모집 과정부터 이미 ‘외교 훈련’은 시작됐다.
참가를 원하는 학생들은 단순한 참가 신청이 아닌 자신이 작성할 기고문 주제를 먼저 제출해야 했다. TOPIK 한국어 능력, APEC에 대한 이해, 콘텐츠 구성 능력까지 종합 평가한 끝에 참가자가 결정됐다. 15개 APEC 회원국과 2개의 비회원국에서 20명이 선정됐다. 선발 과정에 참여한 운영진은 “마치 외교관을 선발하는 것 같은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면접은 온라인으로 이뤄졌지만, 질문은 외교관 채용에서 나올 법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참가자에게 ‘이방인’이 아닌 ‘발신자’로서의 자격을 물었다.
선발 이후에는 온라인 워크숍과 두 차례 조별 멘토링이 이어졌다.
사전 워크숍에서는 전직 대사들이 직접 참여해 이번 APEC 정상회의 의미와 경주와 APEC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정태인 전 대사는 “경주는 고대 유적지인 동시에 동서 해상교역의 관문이었고 신라는 이미 천년 전 국제도시였다”고 강조했다. 또 “거서간, 마립간 같은 왕호, 투르크계 금장식, 인도계 이주민 석탈해 이야기 등 모두 신라의 개방성과 세계적 감각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유복렬 전 대사는 정상 만찬과 정상간 선물, 의상, 문화예술공연 등 정상외교의 백스테이지를 설명했다. 유학생들에게는 정상회담 등의 다소 무거운 주제보다 백스테이지라는 취지에 맞는 내용으로 접근했다.
마지막으로 내일신문 주필을 역임한 남봉우 편집인은 참가자들이 자국 언론매체에 기고를 하기 위한 기고문 작성 요령과 전략을 설명했다.
특강을 마친 뒤에는 외교전문 멘토들과 참가자들이 조별 모임을 통해 인사를 나누고,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체험을 하고 어떤 내용을 자국에 기고할지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그 이후에도 또 한 번의 온라인 미팅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듬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뒤 8월 25일부터 26일까지 이틀간 경주를 직접 찾아 APEC 현장의 분위기를 미리 느끼고 경험했다.
신라의 흔적 위에 외교의 씨앗을 심다
참가자들이 경주역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국립경주박물관.
천년의 유물을 보기 전 입구에 걸린 한 문장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라는 현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안내문이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를 상징하는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박물관에서 만난 수많은 유물들과 찬란한 금관 등은 참가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런데 화려한 금관보다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얼굴무늬수막새 앞에서 참가자들의 발길이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
대만 출신 허여의(중앙대 문화예술경영 석사과정) 씨는 “신라의 미소 사진은 SNS에서 엄청난 반응이 있을 것”이라며 “과거에 멈춘 유산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화”라고 말했다.
APEC 회원국이 아닌 방글라데시 출신 퍼더스 자네틀(세명대 바이오제약산업학부)씨는 “신라가 이미 천 년 전부터 세계와 소통했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우리나라도 APEC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후 이동한 장소는 APEC 정상회의가 열릴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 아직 일부 구역이 공사 중이라 참가자들은 외관을 둘러보고 단체사진을 촬영한 뒤 상상력을 총동원해 머릿속으로 회의장을 그려봤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자국을 대표하게 된다면 어떤 말을 꺼낼까?”라는 상상은 그들의 표정을 진지하게 만들었다.
이날 마지막 일정은 신라 복식 체험. 화려한 색감과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회의장을 배경으로 찍은 단체 사진은 참가자들의 SNS를 타고 즉각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미국 출신의 탈 립시츠(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 씨는 “블랙핑크 제니가 입었던 의상이 신라 복식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걸 알고 놀랐다”며 “이젠 내가 직접 입어보니 더 특별하다”고 말했다.
저녁 식사 후 이어진 세미나 시간. 각 조별 기고문 주제 발표와 멘토 피드백이 오갔다. 이 시간은 마치 작은 국제회의 같았다.
베트남 출신 김수안(인하대 문화컨텐츠경영학 석사과정) 씨는 “보통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하면 서울이나 부산을 떠올리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경주를 알리고 싶다”며 경주 관광과 APEC을 연결한 주제를 설명했다. 그는 베트남 뉴스에 자신의 글을 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시마노우치 와카나(성균관대 동아시아 석사과정) 씨는 자신이 4년간 유학한 일본 나라시와 경주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지방정부 간 문화외교를 주제로 택했다. 그는 경주시의회와 나라시 간 교류 사례를 조사하고 실제 인터뷰도 진행했다.
“국가만이 외교의 주체가 아니라, 지방 도시도 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느꼈어요.”
이튿날 오전 참가자들은 각자의 언어로 기고문을 작성했다. 일부는 자국 언론과 협력해 공식 기사로, 일부는 대학 공식 웹사이트나 블로그에, 일부는 영상 콘텐츠로 재구성해 발표할 계획이다.
기고문 주제는 다양했다. 문화외교, 관광전략, 지방외교, 디지털 콘텐츠, AI와 전통문화의 융합까지. 단순한 체험담이 아닌 실질적인 외교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건축을 전공하고 있는 러시아 출신 크리스티나(이화여대 건축학과) 씨는 “불국사를 수업에서 배웠지만 실제로 와보니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게 달랐다”며 “문화유산이 가진 건축적 철학을 더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자국 대학의 웹진에 건축과 문화유산의 관계를 기고문으로 작성해 제출했다.
투고와 수료식을 마친 뒤 이어진 일정은 직접 체험이었다. 전문강사가 진행하는 전통공예인 나전칠기 만들기가 진행됐다. 반짝이는 자개 조각을 조심스럽게 붙이며 참가자들은 또 하나의 ‘작은 외교 문서’를 손끝으로 완성해갔다.
되살아난 디지털 외교의 길
오후에는 첨성대를 둘러보고, 젊은이들에게 핫한 황리단길도 걸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거리에서 참가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감을 포착했다. 누군가는 관광지의 브랜딩 전략을 메모했고, 누군가는 골목의 간판 디자인을 스마트폰으로 담았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지친 기색은 찾기 어려웠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이제 막 외교의 첫걸음을 뗀 이들처럼 반짝였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과정이 마치 APEC의 구조 같아요.”
“이런 문화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이처럼 디지털 시대의 외교는 작은 이야기에서 시작돼 순식간에 세계로 전파됐다. 그들이 남긴 콘텐츠, 사진, 문장, 기억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각국으로 퍼지고 있다.
외교는 이제 성명서가 아닌 이야기로, 연설이 아닌 경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라가 현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는 박물관 안내문 속 문장은 이번 행사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낸다.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이 교차했던 신라의 옛 수도 경주는 이제 젊은 외국인들이 만든 ‘디지털 외교의 길’ 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사진 몇 장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길이다.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백스테이지에서 경험한 그 길이 이제 넥스트 스테이지를 힘차게 열어젖히고 있다.
경주=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