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비상하는 대만, 추락하는 한국
제2차세계대전 이후 대만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인물로 안중롱이 꼽힌다. 쑨원과 장제스의 처남으로 정부 고위관리였던 쑹쯔원이 안중롱을 발탁했고, 안중롱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연구해 후발 국가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주도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수출입국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봤다. 1963년 안중롱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묘비명은 ‘메이드 인 타이완’이다.
안중롱의 산업화 초석 위에 오늘날 성공한 반도체 국가 대만을 만든 사람은 쑨윈-쑤안이다. 경제장관이 된 그는 한국을 방문해 정부 주도 연구소 등을 둘러보고는 1973년 ‘공업기술연구’를 세워 경공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산업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쑨윈-쑤안은 미국 전력회사 출신 중국계 미국인인 웬위안 판의 건의를 받아들여 반도체 산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안중롱과 쑨윈-쑤안의 선택은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를 넘보는 번영하는 대만을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공학도’라는 점이다. 안중롱은 교통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쑹윈-쑤안은 하얼빈공업대학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네 마리 용 역전극’ 한국 추월하는 대만
1970~1980년대 ‘아시아 네 마리 용’의 선두주자로 고도성장의 상징이던 한국과 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성적표는 극명하게 갈린다. 가장 앞서던 한국이 0%대 성장률에 묶인 사이 대만은 4%대 성장을 기록하며 한국을 추월하고 있다.
대만 주계총처는 최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1%에서 4.45%로 크게 높였다. 불과 석 달 만에 44% 상향 조정된 수치다. 2분기 성장률도 8% 안팎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0.6%에 머물렀다. 대만은 내년 1인당 GDP 4만달러 돌파가 유력하다. 한국은 2014년 3만달러를 넘긴 뒤 11년째 제자리다.
대만의 약진을 이끄는 것은 반도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기업 TSMC를 중심으로 AI 수요에 신속히 대응하며 수출을 끌어올렸다. 올해 수출은 전년 대비 24% 증가가 예상된다. 미국의 고율관세에도 수요가 줄지 않는 이유는 대체 공급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 치중한 탓에 관세충격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두 나라의 산업구조 차이가 성과를 갈랐다. 삼성전자를 축으로 한 한국의 종합반도체(IDM) 모델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기술 내재화에 강점이 있지만 협력생태계가 취약하다. 중소기업·스타트업이 독립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대만은 정부와 연구기관이 주도해 조기에 파운드리 체제를 정착시켰다. TSMC와 수많은 중소기업, 대학이 분업과 협력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개방적 구조가 자리 잡았다.
건강한 반도체 생태계가 경쟁력 만들어
대만의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반도체는 단일기업의 성취로 완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주체가 연결된 건강한 생태계가 있어야 지속가능한 경쟁력이 나온다. 대만은 인재풀을 공동으로 육성하고, 기업 간 신뢰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자국 내 생산유치와 기술자립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단일 대기업 중심의 구조는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 있다.
반면 TSMC가 미국 애리조나, 일본 구마모토 등 해외 생산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연한 파운드리 전략뿐 아니라 협력생태계 전체의 국제적 확장성이 작용했다. 또한 TSMC는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통해 인재풀을 공동으로 확보하고 공동 연구개발 및 공급망 안정화 전략을 체계화해왔다. 반면 한국의 중소 장비업체나 소재업체는 기술력은 높지만 대기업과의 거래의존도가 높고 독립적 사업기반이 약한 경우가 많다. 이는 혁신속도를 제한하고 글로벌 협력의 주체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한국도 이제 ‘삼성만 잘 되는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 중소 장비·소재업체와 스타트업, 학계가 함께 성장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반도체는 기술의 싸움이자 생태계의 싸움이다. 기술력 못지않게 협업 능력, 신뢰 네트워크, 인재 분산이 장기경쟁력을 좌우한다. 네 마리 용의 역전극은 단순한 순위 변동이 아니다. 경제 시스템의 차이가 만든 결과다. 한국이 정체를 벗어나려면 ‘초격차’ 구호보다 산업 전반의 균형발전, 생태계 설계에 집중해야 한다.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의 최첨단뿐만이 아니라 신뢰의 네트워크에서 비롯된다.
안찬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