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체불 ‘생계 위협 범죄’ 더 이상 방치 안된다

2025-09-05 13:00:02 게재

정부 “2030년까지 체불액 절반 줄이고 청산율도 95% 달성” … 징벌적 손해배상, 법정형 상향, 퇴직연금 의무화

#.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은 요양병원장 A씨를 5월 구속했다. 그는 노동자 228명의 임금과 퇴직금 29억6000여만원을 체불한 뒤 돌연 병원을 폐업했다. 폐업 계획을 숨긴 채 직전까지 신규 채용을 강행했다. 2021년에도 70명에게 13억원을 체불해 벌금형을 받았다. 국가가 밀린 임금의 일부를 지급하는 ‘대지급금’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폐업 당일까지 본인 계좌로 1500만원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임금체불은 단순한 채무 불이행이 아니다. 노동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생계 위협 범죄’다. 상습적으로 임금을 떼먹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업주에 대해 노동당국이 잇달아 구속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2조원을 돌파한 임금체불 규모가 올해도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임금체불은 임금 절도”라고 선언한 가운데 2일 기획재정부 법무부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중소벤처기업부 등 ‘범정부 임금체불 근절 추진 태스크포스(TF)’를 열고 ‘임금체불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임금체불 시 이득보다 비용이 더 커지도록 사업주에 대한 경제적 제재와 법정형 상향 등 처벌 수위를 강화해 체불을 2030년까지 절반 수준인 1조원 이하로 줄이고 청산율도 95% 달성을 목표로 한다. 그동안 노동부 근로감독과 근로기준법상 제재 중심의 임금체불 감축 방안에서 나아가 체불이 발생하기 쉬운 산업구조적 요인까지 개선하고 관계부처의 정책수단을 총동원해 임금체불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과거 정부와 달리 강력한 제재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국무회의에서 “임금을 충분히 줄 수 있는데 안 주고 버틴다든지 재범한다든지 하면 아주 엄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체불 근절 대책을 마련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사후 청산 중심의 접근”이라며 예방책 부족을 지적한다. 이번 대책이 선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체불 걱정 없는 노동환경으로 이어질 지 지켜볼 일이다.

범정부 임금체불 근절대책 발표하는 김영훈 장관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범정부 임금체불 근절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임금체불 총액은 2조448억원으로 처음 2조원을 넘었다. 불과 5년 전보다 30% 증가한 수치다.

올해도 6월 기준 1조100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 늘면서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이 3015억원(27.4%)으로 가장 많다. 이어 건설업(2292억원, 20.8%), 운수창고통신업(1766억원, 16%) 순이었다.

규모별로는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전체 체불액의 66.9%(7358억원)가 발생했다. 이어 5~29인(37.1%), 5인 미만(29.8%), 30~99인(16.4%), 100~299인(10.0%), 300인 이상(6.6%) 사업장이 뒤를 이었다. 국적별로는 외국인 체불액이 855억원(7.8% 차지)으로 전년 동기보다 51.4%나 증가했다. 금품별로는 임금 49.0%(5393억원), 퇴직금 41.9%(4607억원), 기타 9.1%(1005억원)이었다.

◆상습체불 제재 강화, 반의사불벌죄 개선 = 정부는 2030년까지 임금체불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청산율을 95%까지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먼저 숨어있는 체불의 선제적 청산을 위해 하반기 근로감독을 기존 계획보다 대폭 확대(1만5000곳→2만7000곳)한다. 재직자 익명제보 감독, 국토부 등 관계부처 및 지방자치단체와 합동 감독도 진행한다.

올해 체불청산율 87% 달성을 목표로 ‘추석 전 체불 집중청산 지도기간’ 운영, 사업주 융자 확대, 피해노동자들에게 ‘대지급금’을 기존 3개월분에서 6개월분으로 늘려 확대 지급한다.

체불 사업주가 정부 지원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로복지공단에 ‘회수전담센터’를 설치하고 국세와 같은 강제징수 절차를 도입한다.

10월 23일 시행되는 ‘상습체불사업주 근절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의 효과적 제도 정착을 지원하고 법 시행 후 제재 사례 등을 널리 알려 체불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번 근기법 개정안에 더해 상습 임금체불에 대한 제재를 추가로 강화했다. 정부는 명단공개 뒤 다시 체불했을 때도 체불임금 3배 이내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대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명단공개와 신용제재 대상을 ‘3년 이내 1회 이상 유죄 확정시’로 확대를 검토하고, 1회라도 명단공개가 된 사업주는 공개기간이 아닐 때 다시 체불하더라도 반의사불벌죄에서 제외해 일괄적 형벌 적용으로 체불 재범행위를 엄단한다.

고액 등 불법성이 높은 체불행위는 1회라도 체불임금을 청산하기 전까지는 정책자금 융자, 공공 보조·지원사업 참여 등 공공재정 투입을 제한한다.

또한 정부는 근기법상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한 처벌 최고수위를 현행 징역 3년 이하에서 5년 이하로 상향한다. 그동안 임금체불이 적발돼도 대부분 체불액의 30% 미만에 그치는 벌금형을 선고 받아 제재 실효성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이에 정부는 사업주가 임금체불을 ‘막대한 경영상 비용’으로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법정형을 횡령 등 재산 범죄형량 수준으로 올린다. 또 검찰의 구형과 법원의 양형기준 상향을 지속적으로 협의한다는 방침이다.

◆퇴직연금 의무화, 2030년까지 전사업장 확대 = 정부는 체불액의 42%를 차지하는 퇴직금을 퇴직연금 의무화한다. 노동부는 2027년을 시작으로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퇴직연금 의무화를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는 구조적 임금체불을 근절하기 위해 근기법을 개정해 ‘하도급 내 임금 비용 구분 지급’(임금을 다른 공사비와 구분해 지급하는 제도) 의무를 법제화하고 이를 반영해 개정한 표준 하도급계약서를 보급한다.

발주자가 하도급 노동자에게 직접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추진한다. 건설·조선업종부터 우선 추진하고 사회적 논의를 통해 적용 업종을 확대할 예정이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임금체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절도이자 심각한 범죄”라며 “이번 대책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체불 데이터 관리체계를 선진화하고 임금체불근절추진TF에서 지속적으로 대책 성과를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필요시 반의사불벌죄 개선 등을 포함한 더욱 강력한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체불 사건이 저임금 노동자와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 간의 다툼이 되지 않도록 범정부 차원에서 대책도 면밀히 고민하겠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정부 대책이 진전된 측면이 있으나 예방대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은 “청산율 상향을 목표로 한 사후 대책에 집중돼 있어 예방적 접근이 부족하다”며 “추석 명절을 앞두고 집중청산을 지도하거나 감독 물량을 확대하는 등 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한시적으로 할 게 아니라 상시적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불법하도급을 원천 근절하지 않는 한 임금체불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며 “반의사불벌죄는 조건부가 아니라 전면적, 즉시 적용 제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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