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기침체 이미 시작된 것인가

2025-09-08 13:00:03 게재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원 “71% 확률로 지난 5월 진입” … 지역·산업별 편차 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경제 정의를 위한 월가 행진(March on Wall Street for Economic Justice)’에 참여한 시위자들이 ‘트럼프는 폭군’이라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이 행사는 알 샤프턴 목사 등이 주도해 월가를 향해 경제 정의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 유지를 촉구하기 위한 시위로 진행됐다. AFP=연합뉴스
미국 경제가 공식적으로 경기 침체에 진입했는지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9일자 테즈 파리크(Tej Parikh)의 기고문에 따르면, 아직 경기 침체 판정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주요 지표 악화와 체감경기의 위축은 이미 침체에 가깝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 시 경기 침체로 본다. 그러나 미국의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고용, 소득, 생산 등 6개 지표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올해 1분기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위축됐으나 2분기 다시 성장세로 전환하면서 단순한 정의상 침체는 피했다. 하지만 NBER 지표들은 대부분 위축 국면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다.

NBER 연구원인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파스칼 미샬라(Pascal Michaillat) 교수는 NBER 방식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NBER 방식은 실업률과 구인 공고 수를 지나치게 간과한다. 또 자료와 수정치를 기다리느라 경기 침체가 실제 시작된 지 몇 달 뒤에야 선언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미샬라 교수는 노동시장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실시간 분석 알고리즘을 적용한 결과, 지난 5월 미국이 이미 71% 확률로 침체에 들어섰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7월에는 구직자 수가 채용공고 수를 넘어서는 현상이 2021년 이후 처음 나타났다.

여론조사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이코노미스트와 유고브가 8월 초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가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고 답했고, 3분의 1은 이미 침체에 들어섰다고 인식했다.

문제는 지역별·산업별 편차가 크다는 점이다. 무디스애널리틱스의 수석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Mark Zandi)는 미국 GDP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주들이 이미 침체이거나 높은 위험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침체에 빠진 주들은 미국 전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텍사스, 뉴욕은 전체 GDP의 3분의 1에 해당하며 여전히 버티고 있고, 이들의 안정성이 경기 전반의 하락을 막는 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농업·제조업·건설업은 이미 침체에 진입했으며 농촌과 공업지대를 직격했다. 반면 의료, 부동산, 첨단기술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산업이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축으로 꼽힌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마크 무로(Mark Muro) 선임연구원은 “AI는 주로 대도시의 사무기술이다. 주요 거점은 캘리포니아 해안 도시와 텍사스의 비즈니스 도시, 그리고 보스턴에서 워싱턴 D.C.에 이르는 지역에 집중돼 있다”고 설명했다.

팬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는 AI 관련 투자가 없었다면 올해 상반기 미국 GDP 성장률이 실제 수치의 절반인 연율 0.6%에 그쳤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러나 AI 효과가 한시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데이터센터 건설은 급증했지만 주거용·제조업·상업용 건설은 모두 감소했다. 고금리와 불확실성 속에 민간 투자가 위축된 결과다.

의료 분야 역시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8월 비농업 부문 신규 고용 2만2000명 중 대부분이 보건·사회복지 분야에서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 2기 출범 이후 새로 창출된 59만8000개 일자리 중 86%가 이 부문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는 건강 문제와 고령화로 인한 수요 확대에 따른 것이지 생산적 투자 확대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소비도 양극화가 뚜렷하다. 모닝컨설트의 ‘소비자건강지수’에 따르면 고소득층은 주식시장 호조에 따른 ‘부의 효과’로 소비를 늘리고 있으나 저소득층은 금리 부담과 취약 산업의 고용 부진으로 소비 여력이 줄고 있다.

옥스퍼드이코노믹스의 버나드 야로스(Bernard Yaros) 수석이코노미스트는 “S&P500 지수가 사상 최고치 부근을 기록하면서 자산 효과가 소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공식적인 경기 침체 판정 여부와 관계없이, 미국 경제는 일부 주와 산업의 활력에 의존해 간신히 버티는 모습이다. FT는 “전국 단위 경기 침체 선언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미국의 상당수 지역과 계층은 이미 침체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

양현승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