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트닉 “한국, 서명없으면 관세 인상”
조지아 구금자 귀국일 맞춰 ‘관세 카드’ … “이젠 옛 방식 안 돼” 노동까지 압박
특히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같은 날 조지아주에서 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00여명이 귀국한 시점과 겹친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이번 구금 사태 이후 외교적 긴장을 무역 압박으로 전환하며 협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미 양국은 지난 7월 30일 새로운 무역협정 초안에 큰 틀에서 합의했다. 핵심은 미국이 한국에 부과할 예정이던 25%의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3500억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구조다. 지난 8월 25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협정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협정 최종 타결은 순조롭지 않다. 실무 차원의 협상은 지난 8일 미 워싱턴에서 진행됐지만 투자 방식과 수익 배분 구조를 놓고 의견 차를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대규모 투자금의 사용처와 회수 방식을 명확히 하고자 하며 한국은 일방적 수익 구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이날 일본과의 사례를 직접 언급했다.
일본은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이미 확정하고 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일본이 낸 자금은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송유관 건설 등 미국의 인프라 프로젝트에 쓰일 것”이라며 “수익은 초기에는 미일 양국이 50대 50으로 나누지만 이후에는 미국이 전체의 90%를 가져간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도 이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연함은 없다”고 덧붙였다. 명확하게 ‘일본 수준 이하 조건은 없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이 같은 발언은 현재 뉴욕에 머물고 있는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방미 일정을 겨냥한 것으로도 읽힌다. 김 장관은 러트닉 장관과 직접 협의를 앞두고 있으며 이번 방미는 실무 협상 결렬 직후 급히 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회를 협상 주도권을 쥐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좋으면 사인해야지, 손해 보는 사인을 왜 하느냐”며 미국 측의 현재 조건을 일축했다. 그는 “앞으로도 한참 더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역 협상 외에도 미국은 외국인 근로자 정책에서도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최근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317명의 한국인이 구금됐다. 이들은 무비자 프로그램(ESTA)이나 B-1 비자 등 단기 체류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현장 노동에 투입된 사실이 드러나며 단속 대상이 됐다. 러트닉 장관은 이에 대해 “이제 옛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적법한 비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자에 문제가 있다면 내게 직접 전화하라.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연결해 돕겠다”면서도 불법 체류나 부적절한 취업 비자 활용에는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국인 노동 정책 구상을 대신 소개하며 “‘입국(A)–미국인 훈련(B)–귀국(C)’의 세 단계 원칙이 도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숙련된 외국인 리더는 단기 취업 비자로 미국에 입국하고, 미국 현지인을 교육·훈련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상이다. 미국 내 일자리 보호와 자국민 기술 이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형적인 ‘트럼프식 정책’이다. 아울러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재배치 등 민감한 사안들도 협상 테이블 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무역협정뿐 아니라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넘어야 할 고개가 많다”며 “퇴임 때까지 수없이 많은 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세, 비자에 투자, 안보까지 맞물린 이번 협상 국면은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한미 양국의 신뢰 구조를 시험하는 중대한 분기점이 되고 있다. 미국이 계속해서 압박의 고삐를 죄어오는 가운데 한국이 어떤 전략과 메시지로 대응할지가 향후 국면을 좌우할 전망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