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자 달러 회피 본격화
트럼프 행정부서 달러 불확실성 커져 … 미국자산 투자 늘려도 환헤지 급증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기조가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에 불확실성을 키우면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도이체방크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들어 미국 주식·채권에 대한 환헤지형 투자 규모가 환노출 투자 규모를 4년 만에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이 같은 변화가 뚜렷해졌다는 설명이다. 조지 사라벨로스 도이체방크 전략가는 “외국인들이 미국 자산을 사들이고 있지만 달러 노출은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며 “달러 노출을 전례 없는 속도로 제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17일 보도에 따르면 실제 최근 3개월 동안 외국계 미국 주식 상장지수펀드(ETF)에 유입된 약 70억달러 중 80%가 헤지형으로, 연초 20% 수준에서 크게 뛰었다. 이러한 헤지 수요 증가는 달러 약세를 심화시켜 올해 달러 가치는 유로와 파운드 등 주요 통화 대비 10% 이상 하락했다. 유로화는 1.18달러를 돌파하며 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피크테자산운용의 아룬 사이 수석 전략가는 자사 미국 주식 보유분에 대한 달러 헤지를 확대하며 “달러가 장기 약세장에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가 9월 실시한 조사에서도 글로벌 펀드매니저의 38%가 달러 약세에 대비한 헤지 확대 의향을 밝혔고, 달러 강세에 대비한다는 응답은 2%에 불과했다.
JP모건 외환전략 공동대표 미라 찬단은 “지금은 ‘미국을 팔아라’가 아니라 ‘달러를 헤지하라’의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약세 흐름이 이어질 경우 추가적인 헤지 수요가 달러 약세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스위스 사설은행 SYZ 그룹의 샤를-앙리 몽쇼 최고투자책임자도 올해 3월 미국 주식에 대해 전면 달러 헤지 포지션으로 전환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강달러 반대 발언이 결정적 계기였다. 올해는 반드시 헤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호주와 덴마크 등 주요 연기금들도 달러 노출을 줄이고 있다. BNP파리바 분석에 따르면 덴마크 연기금은 6월 말까지 달러 비헤지 보유액을 160억달러 줄여 760억달러로 축소했다. 네덜란드 연기금 역시 연초부터 헤지 비중을 높였다. 국제결제은행(BIS)은 6월 보고서에서 “아시아 투자자들의 헤지 수요가 4~5월 달러 약세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통상 채권 투자자들이 수익 안정성을 위해 통화 헤지를 활용하는 데 비해 주식 투자자들은 그동안 헤지 비중이 낮았다. 하지만 올해는 월가 주가가 달러 약세에도 12% 상승했음에도, 유럽 투자자들 기준으로는 2% 하락하는 등 환율 효과가 수익을 깎아 먹으며 흐름이 달라졌다.
소시에테제네랄 키트 저키스 외환전략가는 “달러를 헤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치르길 꺼려왔지만 임계점은 가까워졌다”며 “왜 아직 헤지를 하지 않았는지 묻게 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골드만삭스의 카막샤 트리베디 외환전략가는 미국 단기 금리 하락으로 헤지 비용이 낮아지면서 아시아 투자자들의 추가 헤지 수요가 달러 약세를 더 부추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