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미국 증액 요구에 무역협상 난항”
러트닉 “수용 아니면 관세”한국 내에선 금융위기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발표한 3500억달러 규모의 한·미 무역 합의가 난항을 겪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 보도했다. 협상이 꼬인 배경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한국에 추가 증액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게 핵심이다.
WSJ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최근 한국 측과의 협의에서 3500억달러를 소폭 증액해 일본이 약속한 5500억달러에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자금의 더 많은 부분을 현금으로 제공하라는 입장도 밝혔다.
관련 사정에 밝은 인사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한국이 일본 수준에 근접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보면서도, 일본과 맺은 협정의 주요 조건 대부분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완전히 다른 구조의 협정을 제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WSJ는 전했다. 그렇게 할 경우 일본과 맺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서명된 합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국의 무역 협상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대변인은 러트닉 장관이 결코 한국에 5500억달러 전액을 요구한 적은 없다고 밝혔으나,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WSJ에 따르면 최근 며칠 사이 한국 정부는 워싱턴 주재 대사관을 통해 미국 내 동맹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양측이 이미 구두 합의에 도달한 뒤 트럼프 행정부가 막판 양보를 얻어내려 한다고 경고했다.
러트닉 장관과 한국 측 협상 대표들 간의 대화는 이달에도 뉴욕에서 이어졌다. 이 협상에서 한국은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했다고 WSJ는 전했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이 약 1조8000억달러로 일본의 약 5분의 2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본은 위기 시 미국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통화스와프 협정을 워싱턴과 맺고 있지만, 한국은 그런 외환 안전망이 없어 3500억달러를 마련하려면 달러 보유고를 처분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 금액은 한국의 달러 보유액의 80% 이상을 차지해 금융 위기 시 국가를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다.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최근 미국 측 제안을 수용할 경우 한국이 금융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러트닉 장관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의 협정이 위태로울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백악관 방문에서 무역 논의가 거의 공개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것은 한국 대통령이 “그 종이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세부사항에 악마가 숨어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며 “한국은 그 합의를 수용하든지 아니면 관세를 내든지 둘 중 하나다. 흑백 논리다”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은 이달 초 5500억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자동차 관세를 27.5%에서 15%로 낮췄다. 러트닉 장관은 한국이 일본과 유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발표 당시 한국의 대미 투자가 확정된 것처럼 주장했지만, 한국 정부는 즉각 이를 부인했다. 이후 협상 과정에서 백악관이 “골대를 옮기고 있다”는 불만이 한국 측에서 제기됐다고 WSJ는 전했다.
WSJ는 무역 합의가 최종 타결되지 않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다른 관세 협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한국과의 합의가 성사된다면 미국은 다른 교역국들에도 동일한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