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미국 패권주의의 변화와 대응전략
미국 트럼프행정부의 관세정책은 단순한 보호무역 수단을 넘어서 미국의 경제·외교·안보·에너지 목표를 타국에 압박하기 위한 미국식 패권주의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나라 일본 유럽에 대한 관세율 설정을 미국산 LNG 수출과 연계시키는 것이 미국산 에너지의 영향력을 높임으로써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에너지 지배(Energy Dominance)’ 전략에 따른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관세부과의 주요 명분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른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안보’ 영역은 전통적인 군사 분야에 국한되지 않으며 불법 이민, 불법 펜타닐 유통은 물론 에너지 정책까지도 포함한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이유로 25% 추가 관세를 부과받았고, 캐나다와 멕시코 또한 국경관리 문제를 이유로 고율 관세 부과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흐름은 국제 정치경제질서가 힘이나 거래에 기반한 질서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레튼우즈 체제 탄생 이후 규칙 기반 질서를 떠받쳐온 미국의 전략적 인내는 이제 막을 내렸다. 이는 외부적 도전과 내부적 제약의 복합적 결과다.
트럼프가 택한 ‘하이브리드 패권주의’
중국과 러시아 등 도전국들에 대한 군사외교적 압박만으로는 규칙 기반 질서 준수를 지탱할 수 없었다. 특히 글로벌 제조업과 공급망을 장악하며 거침없이 부상하는 중국의 위상은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그 사이 미국 내부적으로는 산업 경쟁력 약화와 중산층의 불만,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마가(MAGA)로 상징되는 미국 우선주의 운동은 미국 시민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만성적 재정적자와 누적된 천문학적 수준의 국가부채는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근본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아울러 국제분쟁에 대한 과도한 개입과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재정적 한계에 직면한 미국은 비용이 막대한 힘의 보편적 투사 대신 힘의 선택적 투사를 패권 회복의 전략으로 삼은 듯하다.
트럼프가 채택한 이러한 영리한 힘의 투사 방식은 ‘하이브리드 패권주의’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석유·천연가스와 핵심 광물이 풍부한 캐나다 그린란드 알래스카, 시베리아의 북극권, 그리고 일대일로 전략에 따라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 남방항로를 대체할 북극항로가 앞으로 미국 힘의 투사가 전개될 새로운 주무대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패권주의의 변화는 미국이 구축한 지정학적 질서 위에 번영을 누려온 우리나라에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없다. 미국은 더 많은 요구를 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 주도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 지금의 국제체제에서 미국 중심 질서의 대안은 무질서에 불과하다. 미국이 안보 서비스를 철회한다면 국제 무역로는 해적과 지정학적 분쟁에 의해 크게 위축될 것이다. 더욱이 미국의 도전국들은 권위주의적 성격과 한정된 경제력 탓에 우리의 자유민주적 생활양식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우리나라가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편입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제는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의 생존공간을 극대화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하이브리드 패권주의를 단순한 압박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협상력이야말로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길이다. 20세기 초 러시아 팽창에 맞서 영국과 일본이 현실주의적 선택으로 동맹을 맺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냉철한 국제정치적 계산 하에 트럼프행정부의 관세협정 요구에 대응해야 한다.
국익 중심 냉철한 조건부 협상으로 대응해야
그렇다면 우리는 3500억달러 투자가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미국이 어떤 안전보장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트럼프행정부가 상대국의 미국 시장 의존도를 지렛대로 삼아 관세협상을 한다면 우리도 제조업 부활 등 미국의 의존도를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국제 항행의 자유, 원자력 협력, 북극권 자원 개발과 항로 이용, 인공지능·국방기술 협력 등 실질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국익 중심의 냉철한 조건부 협상이야말로 미래 한국의 전략 산업과 안보를 담보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