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발언 파장에 타이레놀 최대 위기 직면
근거 부족에도 불신 확산
타이레놀 제조사 켄뷰(Kenvue)가 상장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2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지난 7월 새로 임시 CEO로 취임한 커크 페리가 임기 70일 만에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주성분)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며 임산부들에게 복용을 자제하라고 했다. 그는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타이레놀을 먹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미국 의학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다수의 연구에서 상관관계가 관찰되긴 했지만 인과관계는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와 규제 당국의 일관된 입장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도 “아세트아미노펜과 자폐증 사이에 연관성이 일부 연구에서 보고됐지만, 인과관계는 확립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발언이 확산되며 타이레놀은 불신 여론에 휘말렸다.
켄뷰는 존슨앤드존슨에서 2년 전 소비자 건강 부문을 분할해 출범한 회사다. 타이레놀 외에도 밴드에이드, 존슨즈베이비 샴푸, 뉴트로지나, 아비노 등을 보유한다.
출범 이후에도 자폐증 연관성을 주장하는 집단소송이 500건 넘게 제기됐지만, 지난해 말 뉴욕 연방법원은 원고 측 전문가 증언이 부족하다며 켄뷰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 측은 항소했으며 일부 주 법원에서는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이사회는 7월 실적 부진을 이유로 기존 CEO를 해임하고 구글·P&G 출신 마케팅 전문가인 페리를 임시 CEO로 앉혔다. 그는 취임 직후 화장품 부문 구조조정을 과제로 삼았으나, 이번 위기로 방향이 전면 수정됐다. 9월 초 페리는 케네디 장관과 만나 안전성을 설명했으나, 이후 케네디가 음모론 성향의 글을 공유하면서 대화는 결렬됐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위기가 현실화됐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서도 신중론은 존재했다. 보건 당국자들은 성급한 단정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대통령은 “나는 그렇게 조심스럽지 않다”며 공개 발언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타이레놀 공식 계정의 2017년 트윗 “임신 중에는 당사 제품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재조명돼 혼란을 키웠다. 켄뷰는 “당시 게시물은 불완전한 표현이며, 현재 지침은 의사 상담 후 복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해명했다.
주가 충격도 컸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 직후 켄뷰 주가는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일주일 새 두 자릿수 하락률을 기록하며 기업가치가 수십억 달러 증발했다. 투자자들은 향후 대규모 소송 리스크와 매출 타격 가능성을 동시에 우려한다. 특히 임산부들이 복용을 피할 경우 오히려 태아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료계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신은 빠르게 퍼지고 있다.
내부적으로 켄뷰는 전략적 대안을 검토 중이다. 회사는 8월 실적 발표에서 비핵심 사업 매각 가능성을 시사했고, 일부 애널리스트는 전체 매각이나 분할매각까지 거론한다. 주력 브랜드 타이레놀의 신뢰 회복이 불확실한 만큼, 포트폴리오 조정과 현금 확보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다만 인수 후보들이 법적 리스크를 우려해 협상력은 제한될 전망이다.
페리는 지난 금요일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팀이 과학에 기반해 다른 이들을 돌본다는 점”이라며 “이런 순간에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고,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보여준 모습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