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트럼프 ‘선불 외교’와 한국의 응전
얼마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3500억달러 규모 대미투자를 두고 “그것은 선불(up front)”이라고 말한 순간 외교의 기본원칙은 완전히 무너졌다. 상호신뢰에 기반한 동맹이 아닌 일방적 요구에 가까운 ‘거래’다. 트럼프행정부는 관세인하라는 당근을 앞세워 한국정부에 거액의 현금투자를 강요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도 “일본식 투자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감세혜택도 없다”며 압박수위를 높였다.
미국은 투자처 선정과 수익 배분에 있어 절대적 우위를 점하려 한다. 수익의 90%를 가져가는 구조는 동맹 간 호혜적 협력이 아닌 강탈에 가깝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런 협상이 아직 정식협약이 아닌 구두약속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마치 계약이 체결된 듯 이행을 강요한다. 한국은 제도적 보호장치도 갖추지 못한 채 일방적 요구에 노출돼 있다.
이같은 방식은 소프트파워 개념을 제시한 조지프 나이 교수와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코헤인 교수가 경고한 ‘힘에 의한 일방주의’다. 그들은 다자주의와 제도적 신뢰가 무너질 때 국제 질서는 오히려 불안정해지고 강대국조차 고립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갈취적 외교는 유럽연합(EU) 일본 캐나다 등 주요 동맹국에도 반복됐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외교적 신뢰는 약해졌다.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통찰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문명의 흥망이 외부 도전에 대한 내부의 ‘응전(response)’ 방식에 달려 있다고 봤다. 응전이 창조적일 때 문명은 도약하지만 방어적이거나 과거로 회귀하면 쇠퇴로 이어진다.
트럼프의 무역전쟁은 미국 제조업 쇠퇴와 중국 부상이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하지만 살인적 고율관세와 투자강요는 창조적 전략이 아니라 방어적 퇴수에 가깝다. 문제는 우리의 대응이다. 한국은 미중 전략경쟁의 한복판에 있다. 미국은 동맹을 이유로 기술협조와 투자를 요구하고 중국은 공급망과 시장을 무기로 견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하나는 퇴수다. 외부 도전에 방어적으로 대응하며 기존 산업과 외교 기조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단기적 안정을 주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술종속과 산업침체를 불러온다. 둘째는 복고다. 과거 수출주도형 성장 모델로 회귀하려는 시도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창조적 귀환이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해 기술자립, 산업구조 재편, 교육·제도개혁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글로벌 무대에 복귀하는 전략이다.
퇴수는 단지 방어일 뿐이고 복고는 쇠퇴로 이어진다. 오직 창조적 귀환만이 문명의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은 비록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만 의외로 정답은 분명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