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역사는 해석이다, 그러나 왜곡일 수는 없다
8.15는 단순한 식민지 해방일이 아니라, 우리가 현대사 속에서 자주독립국으로 등장한 날이다. 그런데 독립기념관 관장이 기념사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라 언급해 논란이 일었다. 일부에서는 전체 맥락상 문제가 없다고 옹호하지만 1년에 단 한번 그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날, 그것도 책임 공직자 입에서 ‘선물’이라는 표현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의도적이었다면 지금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그 점은 곧 선이 되고 면이 된다. 야당 지도부가 국군 장병이 묻혀 있는 현충원이 아닌, 혹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아닌 외국 장군 맥아더 동상을 참배한 일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사초(史草)’를 보지 못하게 한 이유는 권력이 역사를 왜곡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역사 기록이 몸통이라면 해석은 머리다. ‘광복이 선물’이라면 ‘신탁통치도 선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장 식의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도 우리가 신탁통치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역사와 정치학이 분리되지 않은 채 발전한 것도 같은 이유다. 미국은 건국 자체가 곧 정치학의 실험장이었다. 이후 정치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았지만, 오늘날에도 미국의 정치학은 제도와 역사를 분리하지 않는다. 국제정치학에서 외교사 연구가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외세의존의 역사 오늘날도 되풀이
선조는 왜군과 싸운 관군과 의병보다 명나라 지원을 강조하면서 ‘재조지은’이라 했다. 목숨 걸고 싸운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했지만 임금을 따라 피난 갔던 호성공신은 86명, 정난공신은 77명이나 되었다. 외세 의존 사고는 이후 병자호란 때 의병이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사고는 현대에도 반복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 오류를 되풀이했다. 1949년 8월 15일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수여된 1등급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이는 대통령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뿐이었다. 1950년 3월 1일에는 미국인 11명과 영국인 1명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수여했다. 피 흘리며 싸운 독립투사들은 그가 물러난 뒤인 1962년 이후에야 포상을 받았다. 선조와 이승만, 두 사람의 역사 인식은 외세의존이라는 그림자 아래 닮았다.
독립기념관장이 말하는 ‘연합국’에 소련이 포함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이유가 원자폭탄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 참전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본이 소련을 통한 중재에 기대를 걸었기에 그 마지막 탈출구가 사라지자 항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대통령은 8.15 경축사 대신 미국과 러시아의 승전기념일에 참석해 고마움을 표해야 할까?
외세의존적 사고는 오늘날 유엔사 재활성화 논의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은 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연합사의 위상 축소를 우려해 유엔사 재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윤석열정부는 박근혜정부조차 주저했던 그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때 우리를 도왔던 나라들이 지금도 우리 안보에 관여할 이유와 능력이 있는가?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도와야 할 나라들도 있다.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과 외세에 의존하는 태도는 전혀 다른 문제다.
만약 전쟁기념관장이 6.25 기념사에서 “유엔군이 잘 싸워서 나라를 지켰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혹은 독립기념관장이 8.15 기념사에서 “찬탁을 받아들여야 했다”라고 했다면 논란 없이 넘어갔을까?
과거 왜곡되면 미래 또한 왜곡돼
역사는 특정 세력의 장식물이거나, 어느 편의 손에 들린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과거를 반성하기보다 과거를 지배해 현재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결국 국민을 분열시킨다. 역사가 단순한 시험과목이 되어버린 역사 강사의 ‘암기형 역사관’이나, ‘역사관 없는 정치’는 한통속이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계엄을 ‘계몽’, 사육신을 ‘세조에 대한 반역’이라고 해석할 수 없듯이 역사는 국민 모두의 공통 기억이자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이 왜곡되면 우리 미래 또한 왜곡된다. 그리고 역사관은 국가관과 사회관, 나아가 모든 가치관의 근원이다. 외세 의존의 착시를 넘어 우리 자신의 해석으로 역사를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