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성장사다리와 기업가정신

2025-10-15 13:00:02 게재

“중소기업 1만개 가운데 4개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고 중견기업 100개 가운데 1~2개만 대기업으로 크고 있습니다. 기업이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이 거의 없다는 얘기입니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달 출범한 ‘기업성장포럼’ 기조연설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최 회장은 “이것이 대한민국 성장 정체를 가져오는, 특히 민간의 활력이 떨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진단했다.

재계 2위 SK그룹 회장이기도 한 최 회장의 이같은 발언은 성장사다리가 사라진 우리 경제의 현상이 심각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저성장이 이미 새로운 정상(뉴노멀)이 된 지금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화두임을 제시한 셈이다.

규제혁파만으로 성장유인이 될 것인가

기업성장포럼은 대한상의를 비롯 한국경제인협회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단체가 중심인 포럼이다.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정책대안을 마련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포럼에서는 민간의 기여도가 현저히 떨어진 점을 지적했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1994년 기준으로 민간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정도는 8.8%p, 정부는 0.6%p였다. 현재는 민간은 1.5%p, 정부는 0.5%p였다. 30년 동안 민간부문 기여도는 꾸준히 내려온 셈이다. 민간 쪽 활력이 정부보다 더 많이 떨어졌다.

또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활력이 더 떨어졌다. 20~30년전 대기업 10년간 연평균 매출액증가율은 10%를 상회했다. 최근 10년간은 평균 2.6%로 1/4 토막이 됐다. 중소기업도 8~9%대에서 5.4%로 내려앉았다.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성장 기울기가 완만해지지만 변화의 폭이 눈에 띈다.

포럼 참가자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는 기업의 규모(사이즈)가 커질수록 규제가 커졌기 때문으로 봤다. ‘성장지향형 정책’보다는 ‘보호위주형 지원’이어서 기업 성장을 촉진시키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중소기업의 중견기업 진입률 0.04%, 중견기업의 대기업 진입률 1.4%라는 수치는 ‘성장하고 싶은’ 기업생태계가 조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수치들이다. 역으로 중견기업에서 다시 중소기업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6.5%로 나타났다. 최 회장은 포럼에서 “사이즈를 늘리는 사람보다 줄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이고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면 결국 모두 중소기업이 된다”고 우려했다.

포럼 참가자들은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가면 규제가 94개가 늘고 중견에서 대기업이 되는 순간 329개가 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정리하면 ‘법제 전반에 뿌리내린 계단식 성장억제형 규제와 경제형벌 규정’이 기업가정신을 움츠리게 하는 원인이라는 의미다. 이들은 기업활력을 높이고 규제혁파와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규제 전수조사 △시행령·시행규칙 개정 적극 활용 △지역경제 도움되는 앵커기업에 파격적 지원 등을 제시했다.

이같은 정부지원만으로 기업성장 흐름이 바뀔 수 있을까. 한국의 ‘글로벌 기업가정신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가운데 27위 수준이다. 6년 전 조사인데 지금 순위가 더 오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정신을 ‘외부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항상 기회를 추구하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혁신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고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규정했다.

성장은커녕 생존의 절박함에 몰려 있는 중소기업

정부만 바라볼 수 없다.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기존 사업에 안주해 새로운 분야로 사업재편이 늦었다. 하나의 사례로 공급과잉에 몰린 석유화학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직면한 점을 들 수 있다. 급변하는 산업전환 대비가 미흡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상당수 자동차 부품기업(72.6%)이 미래차 전환에 대비하지 못한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사실 중소기업의 0.04%만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조사결과는 중소기업 99.96% 대부분이 성장은커녕 생존의 절박함에 몰려 있는 상태임을 말해준다.

성장사다리를 제대로 세워 기업 규모를 키우고 기업 생태계가 제대로 순환돼야 하지만 저성장 시기에 성장에 뒤쳐진 중소기업이 내실을 다지고 10년, 20년 생존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가 아닐까. 중소기업이 탄탄하고 강소기업을 보유한 독일 일본 대만의 경제생태계를 언제까지 부러워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범현주 산업팀장

범현주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