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캄보디아 온라인 사기에 철퇴

2025-10-15 13:00:01 게재

비트코인 21조원 몰수 등 초강경 제재…한국인 피해자 사건, 국제 공조 촉발

14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시하누크빌 상가 건물에 현지어와 함께 중국어 간판이 즐비하게 붙어 있다. 시하누크빌(캄보디아=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삼아 온라인 사기(스캠), 인신매매, 고문 등 초국가적 범죄를 자행한 조직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대규모 국제 제재를 단행했다. 14일(현지시간) 양국 정부는 ‘프린스 그룹(Prince Group)’과 금융 기업 ‘후이원(Huione)’을 포함한 총 146건의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고 ‘가디언’지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미국 법무부는 이와 함께 프린스 그룹 회장 천즈(Chen Zhi)가 보유한 비트코인 12만7271개, 약 150억달러(한화 약 21조원) 상당을 압류했으며, 이는 미 사법 역사상 최대 규모 암호화폐 몰수라고 밝혔다.

프린스 그룹은 카지노, 부동산, 가상화폐 거래소, 상업은행 등을 운영하며 이익의 상당 부분을 감금·고문을 통해 온라인 사기에 강제로 투입된 외국인 노동자들로부터 얻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기술 단지’로 위장된 복합 건물에 피해자들을 감금하고 고소득 해외 일자리라는 미끼로 유인한 뒤 여권을 빼앗아 ‘돼지 도살(pig butchering)’ 방식의 사기에 강제로 가담시켰다. 이 수법은 가짜 연애 관계를 통해 피해자의 신뢰를 얻은 후 가상화폐 투자로 유도해 전 재산을 갈취하는 방식이다.

프린스 그룹 회장 천즈는 1987년 중국에서 태어나 캄보디아로 건너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급속히 부를 축적했다. 키프로스와 바누아투 시민권을 보유한 그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를 통해 런던의 고급 부동산 시장에도 투자해왔다. 런던에는 1200만파운드(약 230억원) 상당의 저택과 1억파운드 상당 사무용 건물, 고급 아파트 17채를 포함해 프린스 그룹 소유 부동산이 존재하며 모두 이번 제재로 동결됐다.

이베트 쿠퍼 영국 외무장관은 “이런 끔찍한 스캠 센터의 배후 인물들은 피해자들의 돈으로 런던 고급 주택을 사들이고 있다”며 “미국과 함께 국제 범죄조직에 맞서 단호한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미국 재무부는 프린스 그룹을 ‘초국가적 범죄조직’으로 규정하며 천즈 회장을 자금세탁·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기소장에는 천즈가 사기 시설을 직접 지시하고 내부 고문 과정을 관리하며 “죽을 때까지는 때리지 말라”는 지시까지 했다는 정황이 포함됐다. 유죄 확정시 최대 40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

함께 제재 대상에 오른 후이원 그룹은 2011년부터 2025년까지 약 40억달러(5조7000억원)의 불법 자금을 세탁했으며, 이 중 3700만달러는 북한이 해킹으로 탈취한 암호화폐였다. 미국 재무부는 후이원이 북한 해킹 자금의 세탁 통로로 기능해 왔으며, 이 조직과 관련된 모든 거래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국제 공조 제재는 한국에서 발생한 충격적 사건과도 긴밀히 연관돼 있다. 한국인 대학생 A씨(22)는 여름방학 중 캄보디아에 입국했다가 사기 조직에 납치·감금된 뒤 고문 끝에 사망한 채 발견됐다. 가족은 시신이 발견되기 전 몸값 5000만원을 요구받았고, 시신은 인신매매 범죄로 악명 높은 캄포트주 보코르 산 인근에서 발견됐다. 캄보디아 내무부는 “심각한 고문 흔적이 있었다”고 공식 확인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정부는 대사관 직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캄보디아 경찰과 협력할 수 있는 전담 부서를 설치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 책임”이라며 피해자 전원 송환과 관련자 엄벌을 지시했다.

제재 대상에는 프린스 그룹 외에도 진베이 그룹(Jinbei Group), 암호화폐 플랫폼 바이엑스(BYEX Exchange), 스캠 단지 ‘골든 포천 리조트 월드(Golden Fortune Resorts World)’ 등도 포함됐다. 이들은 프놈펜과 시아누크빌 외곽에서 폐쇄형 사기 시설을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과 영국은 이번 조치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산업화된 사이버 사기, 인신매매, 불법 자금 세탁의 실체를 드러냈으며,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피해자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걸쳐 있는 만큼 향후 국제형사재판소 제소나 추가 제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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