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예나 지금이나 차이없는 산업계 탄소중립 인식

2025-10-15 13:00:01 게재

발전소와 기업들의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배출권거래제 제2차 계획기간(2018-2020)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2016년 무렵, 필자는 기업들의 기후변화 전략을 수립하고 온실가스 규제 대응을 자문하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의 고객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철강회사였는데, 앞으로 규제가 어느 수준으로 강화될지 예측하고 이에 대한 사업장의 감축 기술을 발굴해서 투자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주요 임무였다.

여러 사업장을 돌아다니며 엔지니어를 인터뷰하고 그동안 내부에서 보고되지 않았던 감축기술을 발굴해서 향후 5년 간의 투자 계획을 수립하는 일은 나름대로 보람있는 일이었다. 약 6개월의 기간이 걸렸고, CEO를 포함한 주요 임원들에게 컨설팅 결과물을 보고하는 일만 남았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발굴한 성과를 보고하는 것이라 우리는 프로젝트 결과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임원들의 첫 마디는 “정부가 규제 강화하면 먼저 막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의 탄소중립 선언이 있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소위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 차원에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감축목표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홍보하던 시기였다.

임원들은 지금이라도 정부에 달려가서 로비해야 한다며, 투자계획이 담긴 보고서는 미뤄두고 당장 정부 설득용 논의 자료를 만들어내라고 독촉했다. 앞에서는 환경경영 기후변화에 진심인 것처럼 말하지만 뒤로는 정책을 후퇴시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니 선의를 기대했던 필자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임원들이 정부 관계자를 만나 어떻게 로비했는지, 그리고 성공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동안 정부가 기업에 ‘공짜 배출권’을 퍼줘서 우리나라 탄소가격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말로는 탄소중립, 실제로는 감축목표 늦추기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과연 우리나라 기업들의 인식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지금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협회와 기업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기업들은 “경영환경이 어려워서 2030년 감축목표 수준을 2035년까지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라고 불평을 한다. 또 “정부 보조금이 너무 작아 기술개발이 늦어지고 있다”고 이유를 댄다. “다른 나라들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만 너무 많이 줄이고 있다”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배출권거래제가 시작된 10년 전부터 늘 하던 소리다.

모두 한 목소리로 “탄소중립 달성에 동의한다”라고 말하고 홈페이지에 탄소중립을 홍보하고 있지만, 정작 감축목표를 강화하려고 하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항상 반대의 선봉에 서 있다.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제대로 된 감축목표를 정하지 않으면 기업들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2030년대 초부터 수소환원제철을 적용하겠다는 포스코의 약속은 이제 2030년대 후반으로 후퇴했다. 현대자동차는 유럽연합과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2035년부터 모든 차량을 100% 무공해차로 판매할 계획이지만, 규제가 약한 우리나라에서는 2040년 이후로 계획을 잡았다.

온실가스를 줄일 필요가 없으니 기업들은 기술개발(R&D)에 투자할 이유도 없다. 작년 한국은행이 발간한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기업 수준이 양적∙질적으로 매우 낮다고 지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경영환경이 어려워서 당장 줄이기 어렵다”라는 소위 ‘속도 조절론’이 지금 탄소중립으로 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해 8월 헌재 결정이 기준점

지금까지 감축목표 달성에 항상 실패해 왔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선 기업들과 줄다리기하며 감축목표를 정하는 방식부터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정부가 제시한 2035 NDC 논의안에 산업계가 요구한 48% 수준의 감축목표가 포함된 것이 단적인 예다. 기업들의 일시적인 부담 때문에 국가 전체의 중장기 감축목표를 낮추게 된다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에서 ‘미래세대의 환경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 먼저 필요한 것은 2035년 감축목표를 어느 수준으로 수립해야 헌법재판소 결정에 부합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일이다. 감축목표 달성을 위해서 어떤 제도와 지원이 필요한지 논의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권경락 정책활동가 기후환경단체플랜1.5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