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권 파워 세계 10위권 밖으로

2025-10-16 13:00:01 게재

초강대국 지위 흔들리나

1위 싱가포르, 한국 2위

미국 여권의 영향력이 갈수록 약화하고 있다. 헨리 & 파트너스(Henley & Partners)가 최근 발표한 2025년 헨리 여권 지수(Henley Passport Index)에 따르면 미국은 말레이시아와 함께 공동 12위에 그치며, 20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 10위권에서 밀려났다.

헨리 여권 지수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권 소지자가 사전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국가 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다. 미국 여권은 현재 180개국에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지만 이는 싱가포르(193개국), 한국(190개국), 일본(189개국) 등 상위권 국가에 비해 낮은 수치다.

미국은 불과 10년 전인 2014년에 1위를 기록했고 작년까지만 해도 7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25년 7월에는 10위로 떨어진 데 이어 최근 발표에서 12위로 밀려났다. 이러한 하락은 단순한 순위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헨리 & 파트너스 회장이자 지수 창시자인 크리스찬 H. 케일린은 “미국 여권의 지속적인 순위 하락은 세계 이동성의 판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라며 “개방성과 상호 협력을 중시하는 나라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반면 과거의 특권에 의존하는 국가는 점차 쇠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순위 하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 강화된 이민 및 입국 제한 정책은 장기적으로 미국 여권의 신뢰도와 접근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래는 불법 이민 단속을 목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관광객,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에 대한 규제도 동시에 강화됐다.

또한 미국은 상호주의 면에서도 불리한 평가를 받고 있다. 헨리 & 파트너스는 미국 여권 소지자가 180개국에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반면 미국은 오직 46개국 국민에게만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상대국의 보복 조치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브라질은 지난 4월 상호주의 부족을 이유로 미국인을 포함한 일부 국가 국민에 대한 무비자 입국 혜택을 중단했다.

다른 국가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은 최근 무비자 입국 대상국을 확대했지만 미국은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처럼 미국인의 국제 이동성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으며 이는 곧 ‘여권 파워’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시민 인식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헨리 & 파트너스는 미국 내에서 복수 국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개인이 국제적 자유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밝혔다. 단일 미국 시민권만으로는 더 이상 전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템플대학교 로스쿨의 피터 J. 스피로 교수는 “앞으로 수많은 미국인들이 법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추가 국적을 확보하려 할 것”이라며 “복수 시민권은 이제 미국 사회에서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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