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팽창·금융완화 아베노선 계승 한계
자민당, 간신히 정권 연장불구 갈수록 쇠락의 길 … "유신회, 내각 참여없이 정책연대로 연립"
21일 다카이치 내각 출범 유력
일본 상하 양원은 21일 임시국회를 소집해 제104대 내각 총리대신을 선출한다. 일본 언론은 절대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이 없는 가운데 원내 제1당인 자민당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가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고 전망했다.
다카이치 총재는 외교안보와 경제정책 등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자처한다. 하지만 연립이 유력한 ‘일본 유신회’ 정책을 수용하고, 두 당이 합쳐도 과반의석에 미치지 못해 아베노믹스 계승은 한계가 있을 전망이다.
일본 사상 첫 여성 총리 예고
다카이치 총재는 21일 임시국회에서 총리 선출이 유력하다.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과반의석을 가진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20년 이상 연립정권을 유지했던 공명당이 이탈하면서 ‘비자민 연립정권’ 가능성도 나왔지만 야당의 분열로 자민당 정권의 유지가 가능해졌다는 분석이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일본은 행정부 수반인 총리를 국회에서 뽑는다. 현재 일본 정치지형은 상하원 모두 여소야대 정국이다. 집권 자민당은 하원인 중의원에서 전체 465석 가운데 196석에 불과해 과반의석(233석)에 크게 모자란다. 더구나 연립을 구성했던 공명당(24석)이 이탈하면서 자칫 정권을 야당에 내줄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의원 제3당인 유신회(35석)와 연립 구성에 합의하면서 총리 선출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일본은 상하원 총리선출 결과가 다르면 중의원 결정이 우선한다. 극우성향 참정당과 공산당까지 원내 야당만 6~7개에 이르고 노선도 다른 상황에서 자민-유신회(231석)가 지지하는 다카이치 총재의 선출이 유력한 배경이다.
다만 두 당의 연립은 낮은 차원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다. 높은 수준의 연립정권인 내각 공동참여에 유신회가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카이치 총재는 최근 연립정권 협의 과정에서 복수의 각료 자리를 유신회에 제안했지만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사히신문은 19일 “두 당은 20일 연립정권 수립을 위해 정식합의에 이를 것”이라면서도 “자민당은 내각 안에서 협력을 원하지만 선거를 우려한 유신회는 내각 밖에서 협력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신회가 높은 차원의 공동정권인 입각을 거부하는 데는 고물가와 정치자금 부정 문제 등으로 민심으로부터 이반된 자민당과 얽히는 것을 우려한 고육책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편 다카이치 총리의 등장은 일본 정치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자민당 첫 여성 총재이면서 첫 여성 총리가 된다. 국회의원 전체 인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 137위(19.0%)로 최하위권에 속하는 나라에서 행정부 수반에 여성이 취임한다는 의미가 작지 않다는 평가다.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계승자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의미도 있다. 최근 5년 가까이 자민당과 내각을 이끌었던 기시다 전 총리와 이시바 총리는 아베 노선과 일정한 차별화에 나섰던 반면 다카이치는 공개적으로 아베 노선의 계승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주가·환율 급등, 다카이치 트레이드 꺾여
다카이치 총리가 취임할 경우 그동안 강조했던 아베노믹스의 계승 여부가 관심이다. 아베 전 총리가 2012년 재집권한 이후 펼친 외교안보와 경제·금융정책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는 아베노믹스의 승계는 일본 정치와 경제는 물론 동북아 정세와 글로벌 금융시장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치와 외교안보 등의 분야에서는 한층 보수적 색채가 강화될 수 있다. △자위대를 헌법에 삽입하는 등의 평화헌법 개정 △인도·태평양지역에서 중국의 고립 추진 △한미일 협력의 강화 등은 유신회는 물론 일부 야당도 동조하고 있거나 더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2027년까지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까지 방위비를 인상하는 정책은 계속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헌법개정 문제는 야당을 비롯해 국회의석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벽이 높아 단기간 내 실현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다카이치가 그동안 일관되게 보였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도 한국과 중국, 특히 한미일 협력이라는 미국측 요구 등에 따라 유보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다카이치 총재는 지난주 있었던 야스쿠니신사 가을대제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경제·금융정책도 아베 전 총리의 노선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다. 연립정권에 합의한 유신회는 다카이치 총재가 추진하고자 하는 재정확장과 금융완화의 지속에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유신회가 재정건전화를 중시해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구소측은 “유신회가 교육과 보육 등에 대한 지원에 지출을 집중하면서도 세출개혁을 강조했다”며 “전체 재정지출 확대에 신중한 데다 재정수지 흑자를 강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신회는 금융정책에서도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중시한다. 금리인상을 포함한 금융정책의 정상화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유신회의 이러한 입장은 다카이치의 평소 입장과 대비된다. 그는 이달 4일 기자회견에서 “금융정책에 대한 책임은 정부가 갖는다”거나 “경제정책은 정부와 일본은행이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 전 총리가 평소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라고 말하는 등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해치는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달 초 다카이치가 자민당 총재로 당선돼 차기 총리가 유력해지자 금융시장은 요동치기도 했다. 당초 이르면 10월 말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예상했던 시장의 전망이 급변하면서 주가와 환율이 급등하는 등 이른바 ‘다카이치 트레이드’ 장세가 펼쳐지기도 했다.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경제 및 금융정책에서 다카이치 색깔은 엷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닛케이지수 4만9000포인트, 엔달러 환율 155엔 등과 같은 ‘다카이치 트레이드’의 기세는 식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16일 기자회견에서 향후 추가적인 금리인상과 관련 “경제 및 물가가 예상대로 나오면 금융완화의 정도를 조정해 나가겠다는 점은 변화가 없다”고 했다. 일본은행은 이달 29~30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향후 통화정책방향 등을 결정한다.
자민당의 쇠락, 일본정치 다당화 가속
최근 일본 정치는 보수화·다당화 경향이 뚜렷하다는 평가다. 이번 자민-유신회 연합도 중장기적으로 일본 정치의 재편 과정이라는 분석이다. 공명당의 연립정권 이탈도 이러한 재편의 흐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선 자민당의 당세가 갈수록 약화하고 있다. 10년에 가까운 아베정권 동안 안정적 과반의석을 확보했던 자민당은 최근 서너 차례 총선에서 잇따라 패배했다. 지난해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전체 의석 465석 가운데 과반에 크게 모자라는 191석(41.1%)에 그쳤다. 2009년 정권을 야당에 넘겨줄 때 참패한 이후 네 차례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했던 데서 크게 후퇴했다.
정당 비례대표 득표율도 낮아지고 있다. 아베정권 때 30%를 웃돌던 득표율은 지난해 중의원(26.73%)과 올해 참의원(21.6%)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크게 하락했다. 내각지지율은 출범 당시 40%를 웃돌면서 반짝 오름세를 보이지만 대체로 20~30%대 수준에서 그친다.
자민당을 떠받치는 당원수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자민당 당원은 1991년 약 546만명을 정점으로 이후 지속적인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자민당 당원수는 지난 총재선거 당시 투표권을 가진 인원을 기준으로 약 92만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작년 9월 실시한 직전 총재선거(약 105만명) 당시보다 13% 줄어든 수치다. 여기에 농민단체와 우정사업단체, 의사 등 각종 이익단체와 연결된 지지기반도 예전같지 않다는 평가다.
아사히신문 정치부 기자들이 최근 발간한 ‘왕국 붕괴, 자민당’이라는 책에서는 자민당 정치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베정권 때부터 누적된 각종 부정비리와 정치자금 문제, 고물가에 대한 서민의 생활고에 대한 대책 부재 등이 맞물려 자민당으로부터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민당의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지만 유권자들은 기존 리버럴 야당이 아닌 보다 보수적이고 극우적인 정당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인 퍼스트’를 주창하며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14석을 얻은 참정당이 있다. 이들은 유럽의 극우정당과 같은 외국인 배외주의라는 비판을 받지만, 자민당을 지지했던 보수층이 참정당 지지로 돌아섰다는 분석이다.
아사히신문은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여당과 그 대안이 안되는 야당,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이 증대하고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포퓰리즘적 주장이 목소리를 키우면서 정치적 분단의 확대와 중대한 정책결정의 지연이 우려된다”고 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