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갈색의 과학 - TV가 말하지 않은 마이야르 이야기
도톰한 쇠고기 안심이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놓인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육즙과 기름이 각각 다른 목청을 낸다. 수분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튀어오른다. 향신료와 소스, 버터를 넣자 TV 화면은 스테이크의 향미로 가득 찬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들뜬 진행자는 과장스럽게 손을 펼쳐 흔들며 냄새를 맡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스테이크를 뒤집더니 갈색으로 익은 표면을 가리키며 “봐요 봐요! 이 마이야르 반응으로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변했어요!”하고 손뼉을 친다. 순간 필자의 TV 화면 안에는 물음표로 가득 차 버린다.
마이야르는 사람 이름이다. 루이 카미유 마이야르(Louis-Camille Maillard)라는 프랑스 화학자로 1912년에 아미노산과 환원당이 반응해 갈색물질을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식품의 가열, 조리 또는 저장 중 일어나는 갈변현상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아미노 카보닐 반응이라고도 하며 아미노기와 카보닐기가 합쳐져 특유의 색과 향을 생성하는 반응이다.
당시 마이야르의 연구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1953년 미국 농무부 화학자 존 호지(John Hodge)가 ‘마이야르 반응’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히면서 식품화학 분야에서 빠질 수 없는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기 속 환원당을 찾습니다
마이야르 반응은 환원당과 아미노산이 함께 존재하면 자연적으로 일어난다. 상온에서도 서서히 진행되며 온도를 높이면 반응속도는 급격히 증가한다. 그런데 고기를 구울 때 정말 마이야르 반응이 활발할까? 근육에는 아미노산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환원당은 어디서 나올까?
근육 내 글리코겐이 환원당으로 분해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도축 이후 혐기적 상태가 되면서 글리코겐은 젖산으로 전환되며 급격히 감소한다. 도축 이후 숙성과정으로 자체 효소에 분해되는 유리아미노산은 증가하지만 이미 감소된 환원당은 어디서 보충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마이야르 반응이 활발하게 일어날 여건은 사실상 제한적이다.
TV가 요리과학을 대중화했지만 ‘고기의 갈색화 = 마이야르 반응’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공식이 절대 진리처럼 대중에게 각인시켜 버렸다.
하지만 프라이팬 위의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고기를 구울 때의 색 변화는 여러 화학반응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결과다. 근육의 미오글로빈은 열에 의해 변성되며 붉은색(oxymyoglobin)에서 갈색(metmyoglobin)으로 변한다. 지방의 가열 산화로 생기는 풍미와 색 변화, 육즙 증발로 표면에 농축되는 물질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첨가물 중의 환원당과 아미노산의 만남으로 마이야르 반응이 없으리라고 단정 짓지 않겠다. 이에 더해 소스의 당분은 고온에서 아미노산 없이도 탈수·분해되고 중합되면서 ‘캐러멜화 반응’을 일으킨다. 이는 마이야르 반응과 전혀 다른 갈색화 메커니즘이다. 사실 캐러멜화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중합물들은 식품의 색소 첨가물로도 사용된다.
갈색화는 비효소적 반응뿐 아니라 효소적 반응으로도 나타난다. 감자나 사과를 자르면 곧바로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세포 안의 폴리페놀 옥시데이스라는 효소가 조직 손상으로 페놀 화합물과 만나면 산소 존재 하에 페놀을 퀴논으로 산화시키고, 이것이 중합하여 멜라닌 계열의 갈색 색소를 형성한다. 열도 가하지 않았고 당이나 아미노산도 관여하지 않았는데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레몬즙이나 소금물로 효소 활성을 억제하면 이들의 변색을 막을 수 있다.
마이야르 반응은 우리의 전통음식에서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장이다. 콩을 발효시켜 만든 메주에는 단백질이 분해되어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여기에 소금물을 부어 숙성시키는 동안 발효 미생물이 전분을 분해해 생성한 당과 유리된 아미노산이 서로 만나면서 서서히 마이야르 반응이 진행된다.
이 반응은 고온이 아닌 상온에서, 심지어 몇 달에 걸쳐 천천히 일어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장의 색이 진해지고 특유의 구수한 향이 깊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된장 고추장 역시 마찬가지다. 장독대 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익어가는 장들은 모두 느린 마이야르 반응의 산물이다.
프라이팬 위의 오해와 장독대 위의 진실
마이야르 반응은 고기를 센 불에 지지는 순간에만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수백 년간 장독대 위에서 기다려온 ‘인내의 화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TV 속 진행자는 여전히 프라이팬 위의 그 찰나만을 마이야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화면 너머의 복잡한 화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 음식을, 그리고 과학을 제대로 존중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