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S 의장 “신용평가 부실, 시스템 위험 부른다”
신용등급 ‘쇼핑’ 경고
월가, 실사 강화·자료 요구
UBS의 콜름 켈러허(Colm Kelleher) 의장은 4일(현지시간) 홍콩에서 열린 국제금융지도자투자정상회의에서 “미국 보험사들이 사모대출 자산에 대해 유리한 신용등급을 찾아다니는 ‘등급 차익거래(ratings arbitrage)’를 벌이고 있다”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 은행들이 저신용 대출을 포장할 때와 유사한 행태로, 글로벌 금융시장에 ‘다가오는 시스템 위험(looming systemic risk)’을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켈러허 의장은 “소규모 신용평가사들이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보험사 자산에 대한 사적 등급(private letter ratings)을 남발하고 있다”며 “규제당국이 경기 부양에만 집중한 나머지 금융안정 리스크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결제은행(BIS) 또한 지난달 미국 보험사들이 보유한 사모대출 자산의 신용등급이 과대평가됐을 가능성을 경고하며, 시장 불안 시 ‘헐값 매각(fire sale)’ 위험을 지적한 바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 생명보험사들은 최근 사모대출 채권을 대거 사들이며 신용평가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 등급 방식으로 위험을 관리해왔다. 그러나 잇단 부실 사태로 이 같은 구조의 불투명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 파산한 서브프라임 자동차 대출업체 트라이컬러홀딩스(Tricolor Holdings)와 자동차 부품사 퍼스트브랜즈(First Brands)는 모두 사모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이다. 이들 사례는 신용평가 체계 전반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월가의 경각심을 자극했다.
한편 3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잇단 사기 대출 사건으로 월가 은행들과 자산운용사들이 실사를 강화하고 있다.
주요 대형 은행들은 기업 대출 승인 전에 더 긴 재무기록을 요구하고, 담보 평가를 정기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하고 있다. JP모건체이스와 블랙록 등 대형 금융사들도 관련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화금융협회(SFA)는 최근 ‘사기 방지 태스크포스’를 발족해 내년 2월까지 정기 회의를 열고, 신용사기 탐지 절차 개선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협회는 2008년 위기 이후 강화된 내부통제와 규제가 무력화될 조짐이 보인다며 “이번 사태가 일회성인지, 구조적(systemic) 문제인지 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토론토대 알렉산더 다이크(Alexander Dyck) 교수는 “경제가 좋을수록 기업들은 실적을 부풀려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유인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저신용 대출의 부도율은 아직 높지 않지만, 사기 의혹이 반복되면서 투자자들이 부채시장 전반을 재평가하고 있다.
월가에서는 사모대출 시장의 급팽창 속에 신용평가와 규제의 공백이 맞물리며, 2008년 이전의 ‘등급 쇼핑(rating shopping)’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켈러허 의장의 경고와 금융권의 실사 강화 움직임은, 민간 신용이 금융시스템의 ‘새로운 약한 고리’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