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혈맹에서 거래 상대로, 한미동맹의 새로운 현실
외교 수퍼위크가 지나갔다. 전세계가 한국을 주시했고 온 국민이 숨죽이며 지켜봤다. 북미정상회담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한미 한일 한중 미중 정상회담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선진국으로서 한국의 격상된 위상을 과시하는 부수효과도 거두었다. 한미 간에 우려했던 관세협상이 타결되었고 더불어 핵추진잠수함 도입에도 합의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정부 간 공식외교의 성과도 크지만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26만장 그래픽처리장치(GPU) 제공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쾌거였다. 우리나라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피지컬 AI’라고 하는 미래산업에 선도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공적인 행사를 준비한 우리 정부의 모든 관계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차분히 지난 성과를 정리하고 후속조치를 준비해야 할 때다.
이번 협상에는 불변의 구조적 요소와 가변적 협상의 영역이 있었다. 초강대국이자 우리의 안보에 절대적인 동맹국의 요구라는 구조적 측면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일방적으로 미국에 유리한 결과라고 비판하지만 협상의 현실적 제약을 고려할 때 이번 합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의 연간 투자한도를 200억달러로 제한한 것과 투자금이 함부로 사용되지 않도록 투자처를 결정할 때 ‘상업적 합리성’을 담보하도록 한 내용 등은 이웃 일본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우리 협상팀의 치밀하고도 끈질긴 협상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적 협상이었지만 대가는 작지 않아
미국과의 관세협상이 일본이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해서 나름 성공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동맹국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한 합의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의 단호한 실용의 리더십과 협상팀의 탁월한 협상력 덕분에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지었다고 하지만 앞으로 우리 국민이 떠안아야 할 짐이 결코 작지 않다. 특히 우리는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이어가면서도 우리의 외환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현재의 미국은 ‘미국을 위대하게 하기’ 위해서 동맹국들과 파트너 국가들에게 무리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무역질서가 불공정한 것이라는 자기 모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APEC 회의를 계기로 경주까지 와서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떠나버린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다자협상이 양자협상에 비해 미국에 불리하다고 하더라도 회원국들과 제대로 된 협상도 하지 않고 떠나버리는 것은 세계 지도국을 자처하는 국가로서 할 행동이 아니다.
패권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한 경제력과 함께 국제사회에서의 윤리적 지도력과 그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패권국이 다른 국가들이 따를 수 있는 국제레짐을 제공할 수 없다면 더 이상 패권국이 될 수 없다.
이에 비해서 중국은 이번 회의에 참석하면서 회원국들을 상대로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APEC 설립의 기본 취지가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경제적 통합과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것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중국이 회원국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화두를 던진 셈이 되었다.
국익 최우선에 두도록 견제와 요구 지속해야
이번 관세협상과 외교 이벤트를 통해서 우리 국민은 동맹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학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미국을 ‘우리 편’으로 인식하도록 학습된다. 동맹국으로서 미국은 우리의 평화와 안보를 지켜주고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로 자동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국은 오늘날 한국이 번영된 선진국가로 거듭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고마운 혈맹 국가다. 따라서 미국과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도 나름의 예(禮)를 아는 민족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현재의 미국이 어떤 국가인가에 대한 현실인식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제 국민은 주권자로서 동맹의 실리를 냉정히 따지고 정부가 국익을 최우선에 두도록 견제와 요구를 지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