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풀리자 미국 인수·합병시장 활기
트럼프, 금융·통신·에너지 등 전방위 규제완화 예고…초과 상승 가능한 인수 후보 10곳
미국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다. 2025년 하반기 들어 규제완화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기업 간 결합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금융·통신·에너지 등 전방위 규제완화를 예고한 가운데 기업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대형 딜을 추진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10월 28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1~9월 전세계 M&A 거래액은 약 1조9380억달러(약 2790조원) 로 집계돼 전년 대비 10% 증가했다. 미주 지역 거래액은 1조2600억달러(약 1810조원) 로 26% 확대되며 글로벌 증가세를 이끌었다. 반면 유럽은 5% 감소, 아시아·태평양은 19% 감소하는 등 지역별 온도차가 뚜렷했다.
보고서는 ‘거시적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긴장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주요 산업에서 대형 거래(메가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올해 들어 거래 규모 10억 달러 이상의 메가딜은 27건으로, 지난해보다 늘었다.
규제완화 메시지 M&A 촉진제 역할
기업 인수합병은 본래 경기 민감도가 높은 활동이다. 금리가 높거나 규제가 강화될 때는 기업이 인수에 나서기 어렵다. 하지만 트럼프행정부가 출범 이후 일관되게 내세운 핵심 메시지는 “규제를 걷어내겠다”는 것이다. 이 신호는 곧 ‘M&A 촉진제’로 작용했다.
시장 분석가들은 이번 흐름이 단순한 단기 반등이 아니라 구조적 회복의 시작일 수 있다고 본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향후 12개월 내 인수 가능성이 높은 상장기업을 20여개 선정하며 ‘규제완화 환경에서는 피인수기업의 주가가 평균 대비 6~8% 초과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인수합병이 ‘정책 변화의 파생효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규제가 완화되면 자본이동이 활발해지고, 자본이동은 곧 거래로 이어진다. 한 시장 관계자는 “정책 완화 기대가 거래심리를 개선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업이 대표적이다. 자산 규모 제한 완화, 지역금융기관 간 통합에 대한 심사 완화 기대가 커지면서 지역은행 간 합병이 잇따랐다. 실제로 미국 중서부의 핍스서드(Fifth Third) 은행은 10월 초 코메리카(Comerica)를 109억달러(약 15조7000억원) 규모로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금융 규제 완화 기대가 인수 결정을 앞당겼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방송·미디어 부문에서도 움직임이 빠르다. 넥스타미디어그룹(Nexstar Media Group)은 8월 테그나(TEGNA)를 약 62억달러(약 8조9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방송국 소유 제한 완화 가능성이 제시되자 디지털 미디어와의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정책신호가 곧 기업 전략의 방향타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전략적 결합
흥미로운 점은 인수합병의 축이 전통 산업을 넘어 AI·우주항공·통신인프라·소비재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몇년간 위성통신과 데이터 네트워크를 둘러싼 ‘저궤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위성 발사 기업과 지상 통신사업자 간의 전략적 결합이 활발해졌다.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는 북미 통신망 사업자들과 협력 체계를 구축했고, 아마존의 ‘프로젝트 쿠이퍼’는 위성망 기업 인수를 통해 데이터 전송 인프라를 확보했다. 이러한 우주항공 기반 M&A는 5G를 넘어 6G 네트워크 경쟁의 전초전으로 평가된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엔비디아(Nvidia) 의 노키아(Nokia) 지분 인수다. 엔비디아는 2025년 10월 약 10억달러(약 1조4400억원) 를 투자해 지분 2.9%를 확보하며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양사는 엔비디아의 AI 반도체를 기반으로 5G·6G 네트워크 최적화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AI 기반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기로 했다. 발표 직후 노키아 주가는 하루 만에 25% 급등하며 10년 만의 최대 폭 상승을 기록했다.
이와 함께 소비재 분야에서도 대형 거래가 다시 등장했다. 올해 11월 킴벌리클라크(Kimberly-Clark)가 타이레놀(Tylenol) 브랜드로 알려진 켄뷰(Kenvue) 를 약 170억달러(약 24조5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하며, 헬스케어 소비재 부문의 대표적 M&A로 꼽히고 있다. 트럼프행정부의 인수 규제 완화 조치가 실질적으로 반영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시장은 “정책 변화가 거래 회복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비만 치료제 시장, ‘메트세라 인수전’
바이오 업계에서는 비만치료제 시장을 둘러싼 초대형 인수전이 새로운 M&A 상징으로 떠올랐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화이자(Pfizer)와 노보노디스크(Novo Nordisk)는 미국 바이오기업 메트세라(Metsera) 인수를 두고 최대 100억달러(약 14조4000억원) 규모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메트세라는 장기지속형 주사제 형태의 신약 후보를 보유해 ‘차세대 위고비(Wegovy)’로 불린다.
양사는 비만치료제 시장 1위인 엘리릴리(Eli Lilly)를 추격하기 위해 인수에 나섰다. 인수전은 이미 법정공방으로 번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경쟁은 특허 만료 이후 매출 공백을 메우려는 대형 제약사 간 세력 다툼이자, 향후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의 판도를 바꿀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수 후보군, 중형주·저평가 종목
현재 시장이 주목하는 인수 후보들은 인수 용이한 중형 시가총액, 저평가 구간 진입, 투자은행(IB)과 주요 금융 미디어의 공통 언급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한다.
골드만삭스는 2025년 하반기 M&A 전망보고서에서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 TRIP), 인스메드(Insmed, INSM), 크리스털바이오텍(Krystal Biotech, KRYS), 베라테라퓨틱스(Vera Therapeutics, VERA)를 ‘30~50% 수준의 인수 가능성이 있는 기업군’으로 제시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Business Insider) 와 야후파이낸스(Yahoo Finance) 는 레볼루션메디슨스(Revolution Medicines, RVMD), 도큐사인(DocuSign, DOCU), 드롭박스(Dropbox, DBX) 를 ‘대형사에 인수될 수 있는 중형 기술·바이오기업’으로 꼽았다. 또한 나스닥닷컴(Nasdaq.com) 은 핀터레스트(Pinterest, PINS) 와 로쿠(Roku, ROKU) 를 ‘플랫폼·콘텐츠 생태계 확대 차원의 전략적 인수 후보’로 평가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시가총액이 30억~150억달러 수준으로, 대형사가 부담없이 인수할 수 있는 규모다. 2021~2022년 고점 대비 주가가 평균 40~70% 조정된 상태지만 매출 성장률은 여전히 두자리수를 유지하고 있다.
바이오 부문에서는 인스메드(INSM), 크리스털바이오텍(KRYS), 베라테라퓨틱스(VERA), 레볼루션메디슨스(RVMD)가 글로벌 제약사의 파이프라인 확장 대상이 될 것으로 꼽힌다.
기술·클라우드 분야에서는 도큐사인(DOCU)과 드롭박스(DBX)가 SaaS 대기업의 인수 타깃으로, 모델엔(MDGL)은 영업·수익관리 솔루션 시장에서 세일즈포스나 오라클의 잠재적 인수 대상이란 평가를 받는다.
콘텐츠 플랫폼 측면에서는 핀터레스트(PINS)와 로쿠(ROKU)가 빅테크 기업들의 전략적 확장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핀터레스트는 광고 매출 둔화에도 충성도 높은 이용자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로쿠는 스트리밍 하드웨어·운영체제를 모두 보유해 넷플릭스·디즈니 등에게 매력적인 파트너로 꼽힌다.
정책이 여는 새로운 시장의 문
현재 미국의 M&A 시장은 정책변화가 투자심리를 자극하고, 그 심리가 다시 실제 거래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규제완화는 기업의 행보를 자유롭게 만들었고, 투자자들에게는 새로운 수익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트럼프행정부가 향후 실제로 규제를 완화하고 인수심사기관의 문턱을 낮춘다면 이 흐름은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거나 금리·유동성 여건이 악화될 경우 거래 열기는 다시 식을 수 있다.
시장은 결국 신호에 반응한다. 그리고 지금 시장이 듣고 있는 가장 분명한 신호는 ‘규제가 풀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수합병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현승 기자 hst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