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살롱

걷기의 힘, 사유의 깊이

2025-11-10 13:00:08 게재

가을은 걷기와 책 읽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공기는 차분하고 낙엽이 바람에 실려 발끝을 스친다. 걷는 동안 마음의 속도도 느려지고 생각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책을 읽는 일도 그렇다. 활자를 따라가며 마음을 정돈하는 일, 그것이 걷기와 닮았다. 그래서일까.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운동화 끈을 조이며 다짐한다. “이젠 매일 만보는 걸어야지.” 하지만 정말로 그게 건강의 비결일까.

‘하루 1만보’라는 기준은 오래된 통념이다. 원래는 1960년대 일본의 만보기 광고 문구에서 비롯된 숫자였다. 과학의 근거라기보다 상징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반세기를 지나며 전세계의 건강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최신 연구들이 그 신화를 다시 검증하고 있다. 걷기의 핵심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몸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브리검 여성병원 연구팀은 올해 초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대규모 연구에서 그 근거를 제시했다. 70대 여성 1만3000여명을 11년간 관찰한 결과, 하루 4000보 이상 걷는 날이 주 3회 이상인 경우 사망 위험이 40% 낮았다. 1~2회만 걷더라도 26% 줄었다. 매일 걷지 않아도 일정한 양의 움직임을 유지한 사람들에게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연구책임자 리쿠타 하마야 박사는 “걷기 빈도보다 하루 걸음의 총량이 건강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즉, 완벽한 꾸준함보다 ‘지속가능한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만이라도 몸을 깨워두는 습관이 장기생존율을 높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임이 확인되고 있다.

‘얼마나 많이’보다 ‘얼마나 꾸준히’가 중요

호주 시드니대학교와 스페인 유럽대학 공동 연구팀은 올해 10월에 또 다른 결과를 발표했다. 영국 바이오뱅크 참가자 3만명을 9년 넘게 관찰한 끝에 짧게 여러번 걷는 것보다 10분 이상 연속으로 걷는 습관이 심혈관질환과 사망 위험을 크게 낮췄다는 것이다. 5분 미만으로 자주 끊어 걷는 사람의 사망률은 4%대였지만, 10~15분 이상 이어서 걷는 사람은 1% 안팎이었다. 하루 걸음수가 적더라도 집중된 걷기 시간이 있으면 건강에 유리했다.

연구팀은 “몸이 운동모드로 전환되려면 일정 시간 이상의 지속 자극이 필요하다”고 해석했다.

하루 중 10분은 누구에게나 있다.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점심 후 잠깐 바깥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그 시간을 기억한다. 완벽한 운동계획이 아니라, 꾸준한 일상의 틈새가 건강의 변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렇게 챙겨가며 걸어야 할 만큼 걷기가 중요한가. 그 답은 뇌에서 나온다. 하버드 의과대학과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공동 연구팀은 올해 ‘네이처 메디신’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인지기능이 정상인 50~90세 고령층 296명을 14년간 추적한 결과 하루 5000보 내외의 걷기가 알츠하이머병 병리 변화를 늦추고 인지저하 속도를 절반 가까이 줄였다.

특히 타우 단백질 축적이 억제된 점이 중요하다. 기억력 저하와 직접 관련된 물질이 실제로 감소한 것이다. 효과는 7000보를 넘기면 더 커지지 않았다. 가능한 수준의 꾸준한 걸음이 뇌를 지키는 길임이 확인된 셈이다.

이렇듯 최근의 연구들은 하나의 공통된 결론으로 모인다. 매일이 아니어도 된다. 주 2~3회, 하루 4000보 이상이면 충분하다. 같은 걸음 수라도 10분 이상 이어서 걷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하루 5000~7000보 정도가 몸과 뇌가 함께 반응하는 가장 이상적인 범위다. 결국 건강의 비밀은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얼마나 꾸준히’다.

걷기는 인류의 오래된 사유 방식

돌이켜보면 걷기는 인류가 가진 가장 오래된 사유의 방식이었다. 걷는 동안 사람은 호흡을 세며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되돌아본다. 바쁜 도시의 길 위에서도 일정한 속도로 걸을 때 비로소 내면의 균형이 회복된다. 오래 걷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는 그 시간이 걷기의 의미다.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누구보다 걷기를 사랑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km를 걸으며 인물의 대사를 구상했다. “걸어서 행복해지고, 걸어서 건강해지라. 우리의 나날을 연장하는 최선의 방법은 꾸준히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최신 의학이 도달한 결론과 같다.

가을의 길 위를 걸을 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건강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책을 읽듯 천천히 걷는 사람은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안다. 그 대화가 깊어질수록 삶은 단단해진다. 걷기는 결국, 생각을 정제하고 마음을 다듬는 가장 인간적인 시간이다.

신승건 부산 연제구보건소 소장